포스코그룹의 장인화 신임 회장의 취임을 광양시민 그리고 기업인들과 함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포스코그룹의 미래를 준비하는 매우 중요한 시기에 철강분야 최고의 전문가로서 존경받으며, 이차전지 소재 및 수소산업 등 신산업 육성에도 탁월한 리더십을 보여주시는 장인화 회장의 취임은 대내외적으로 포스코그룹이 대한민국을 넘어 글로벌 선도기업으로 우뚝 설 수 있다는 강한 신뢰와 확신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광양시는 포스코와 상생의 공동운명체로서 기쁨과 감회가 남다릅니다. 그동안 시민 모두가 상생과 소통의 마음으로 기업을 응원하며 기업하기 좋은
진상면 섬거(蟾居)마을 동제(洞祭)전국에 장승제를 지내는 곳은 많다. 예전에는 진상면 섬거(蟾居)마을 동제(洞祭) 때 장승제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광양군지(1983년)』, 『마을유래지(1988년)』에는 섬거마을 당산제로 기록되어 있으나 마을에서는 당산제라는 용어는 쓰지 않고 ‘섬거 동제’라 부르고 있다. 동제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마을의 유래가 500여년을 넘었고 지신(地神)을 모시는 신체(身體)의 귀목나무(느티나무) 수령이 400년을 넘었다고 전하니 마을의 역사와 거의 같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이 마을 김태호(金泰鎬)
영하의 날씨에 산에서 내려와 마을 회관에서 거실 옆에 자그마한 방에서 따뜻한 차(茶)를 나누며 그는 어렸을 적 어른들한테서 들었다면서 하는 말씀이 “조두환 공이 민보군에 쫓길 때 그날 새벽에 눈이 내렸는데 본 마을 출신으로 지역 지형을 잘 아는 편이라 민보군에 쫓기다보니 엉겁결에 신은 짚신을 거꾸로 신고 바로 보이는 도랑(또랑)쪽으로 들면서 바위밑 굴속으로 숨어 들어가 있는데 불과 몇 분후 굴바로 앞에 있는 큰 바위에 올라서서 조두환 공을 쫓던 민보군이하는 얘기가 ‘야, 이사람이 금방 빠져나가 부렀네’라고 하는 소리를 굴안에서 듣고
존재하는 모든 것이 변하듯 구봉산도 끝없는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 최전방 군사통신시설로서의 봉수대 역할은 근대화와 더불어 막을 내리고 이제는 관광 활성화의 대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한 구봉산의 변천 과정을 동시대의 역사가, 즉 史람이 기록해 놓은 것이 구봉산의 역사이다. 후세 사람들은 그 역史를 통해 누가 언제 무엇을 왜 하였는지 기억하고, 그 기억 속에 역사적 평가를 담는다.이미 결론이 났다, 구봉산 정상에 타워 설치는 불가함이광양시와 지역 기업이 구봉산 정상 체험형 조형물 설치를
성현(聖顯)을 보이는 돌과 나무서낭당은 마을을 수호하는 서낭신을 모셔 놓은 신당을 말하는데, 마을 입구나 고갯마루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생활 종교였던 서낭당이 세계종교에 밀려 퇴색되어 버렸고, 마을 신앙마저 사라지고 있다. 서낭당을 성황당(城隍堂)이라고도 하는데, 성황당(城隍堂)과 서낭당(西娘堂)으로 표기를 달리 해야 하고, 둘을 구분하여 어원을 다르게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몽고는 드넓은 초원에 오래된 유목의 역사를 갖고 있다. 산이나 언덕에 우리의 서낭당과 같은 돌무더기가 있는데 이를 오보(oboo)라 한다
광양의 우주수(宇宙樹)읍치(邑治)란 고을 수령이 일을 보던 관아(官衙)가 있는 곳을 말한다. 따라서 그 고을의 행정 중심지였다. 일반적으로 읍치는 여러 가지 환란(患亂)에 대비하기 위해 길지(吉地)를 택해 성(城)을 쌓았다고 한다. 조선 시대 읍치(邑治)에서는 1묘(廟)3단(壇)이 기본적으로 운영됐다. 다시 말해 각 고을의 문묘, 사직단, 성황단, 여제단 네 곳을 나라가 관리했다는 것이다. 문묘는 대성전을 정전(正殿)으로 하여 구성돼 있다. 여기에는 공자를 비롯한 오성(五聖)이라 불리는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자(子思子)·맹자
지난해 순천에서는 순천영호도회소 기념사업회를 창설해 동학농민혁명 129주년을 맞아 제1회 순천영호도회소 학술대회를 순천대학교 70주년 기념관에서 10월 26일에 개최한 바 있다. 이날 학술대회는 김평부 동학북소리 공연 후, 주영채(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이 좌장으로 한양대학교 윤석산 교수, 대구대학교 김용휘 교수. 청주대학교 김양식 교수와 토론으로 한국창의예술고 명혜정, 우석대학교 문동규, 순천대학교 최현주 선생이 참여했다.학술대회에서 필자는 김양식 교수에게 “영호도회소 수접주로 활동한 유수덕은 순천사람이 아니고 광양사람이며 광양
역설(逆說)중세의 신 중심의 시대가 가고, 오늘날 과학 지상주의 시대가 되었다. 과학이란 것은 모두 좋은 것, 불변의 진리를 담고 있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과학은 관찰이라는 수단과 그것에 기초한 추론을 통해 먼저 대상과 세계에 대한 개별적 사실들을 발견하고, 다음으로는 그 사실들을 상호 연결해 주며, 미래에 발생할 것에 대한 예측을 가능하게 해 주는 법칙을 발견하고자 한다. 이제 과학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사용되고 만병통치약으로 쓰인다.인간이 과학적이고 합리적 사고를 한다고 해서 지구의 모순과 문제점이 발생하지 않
간밤에 비가 내린 탓이었을까? 방금 세수를 끝낸 듯한 나무들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다. 모처럼 맑은 풍경을 대하니 흐려있던 내 눈도 마음도 한층 밝아진 느낌이다. 겨울이면 항상 주위를 맴도는 바람과 추위에 익숙한 산속 생활이지만 가끔은 수고했다며 슬쩍 건네주는 선물은 그동안의 힘겨웠던 시간들을 모두 잊게 해 준다. 겨울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따뜻한 햇살 하나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행복하고 아름다워 보인다.다가오는 햇살의 유혹에 이끌린 나머지 뒷산에 가려다 말고 처마 밑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정수리 부근이 따뜻해지면서 온몸으로
세계종교와 원시종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종교(宗敎)는 초인간적 세계와 관련된 신념이나 의례 등으로 구성된 문화현상이다”라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초월적·절대적 존재에 대한 경험과 신앙에 기반을 둔 교의·의례·시설·조직을 갖춘 사회 집단이 형성되는 문화현상을 다룬다. 종교는 신을 연구해 그 등급을 매기는 것이 아니라 신이 있다고 믿는 인간을 대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문화인류학자들은 종교를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로 나눈다. 보통 ‘고’의 반대개념은 ‘저’이고, ‘상’의 반대개념은 ‘하’로 쓴다. 물론 ‘고하(高下)’라는 말을 사용
앞서 유수덕, 유화덕, 조두환 세 분을 언급했는데 그들은 우리광양 뿐만아니라 전남동부권에서 당시 지체있는 분들이라 동학혁명활동 이외 집안 내력과 일반활동 사항을 잠깐 소개를 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먼저 유수덕 공의 집안 후손들의 얘기로 광양군 봉강면 강변촌에서 발생한 이학조 치사사건 보고서(1897.8)등의 기록을 찾아보면.유수덕 공의 가까운 집안 후손(유상열 1941년생)의 이야기에 의하면 유수덕 선조는 조령마을 출신으로 증조조와 유하덕 선조와 친형제 지간이나 사촌 형제로 알고 있는데 선조가 동학에 큰 인물로 활동을 하다가 희생을
동학의 시발 19세기 중반기를 넘어 농민항쟁이 계속됨에도 농민들의 요구사항은 반영되지 않고 더욱 악화일로에 있을 때 안으로는 외척세력의 발호와 폐단이 갈수록 심해졌으며, 밖으로는 서양과 일본세력의 침략이 노골화 함으로서 국민들의 위기의식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더욱이 삼정의 문란에 따른 중앙정부위 통제력이 이완되면서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증가하는 추세로 조선정부는 산적한 모순을 해결할 능력을 이미 상실한 상태였다. 이 무렵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1824-1864)에 의해 창도된 東學이념이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이론을 제시해 세
천마시풍형(天馬嘶風形)의 늑포(勒浦)「기밀록(機密錄)」의 한 부분을 인용해 보자.東五十里勒浦 天馬嘶風形 龍遠虎近 左有卓旗 右有大江 小溪合流 三陽多峰 世世登榮(9면) (현의) 동쪽 50리 늑포에 천마가 바람을 가르며 울부짖는 형국이 있다. 용은 멀고 범은 가깝다. 왼쪽에 탁자의 깃발이 있고, 오른쪽에 큰 강이 있다. 적은 냇물이 합류하고 삼양에 봉우리가 많으니 대대로 영화에 오른다. 늑포(勒浦)가 어디일까? 많은 궁금증이 생겼다. 주위의 사람들과 연로하신 분들에게 물었으나 아는 분이 없다. 진월면 구동마을에서 재를 넘으면 금동마을이다
삼명육통(三明六通)과 삼통(三通)과연 인간은 차원이 다른 세계를 접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일반인들이 갖지 못한 영적인 축(軸)을 가진 사람은 가능하다고 본다. 이들은 공부를 하든, 명상을 하든, 아니면 어느 날 갑자기 초능력을 갖게 되든, 모두 신안(神眼)을 갖게 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색(色)과 공(空)의 세계를 넘나들 수 없지만, 이들은 색(色)과 공(空)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 이런 능력을 불가에서 삼명육통(三明六通)이라 한다. 석가와 아라한(阿羅漢)이 최초의 깨달음에 도달할 때 얻었다는 3가지 초인적 지혜와
차원이 다른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차원이 다른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한편으로는 신기하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할 것이며,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나 정신병자 취급을 할 것이다. 물론 필자가 이야기하는 바가 정답은 아니다. 단지 이해의 돌파구가 되지 않을까 해서 이 글을 쓴다. 2013년 7월 1일 자 ○○일보 유명한 칼럼에 소개된 적이 있다. “25년 넘게 전국의 혈(穴) 자리를 발로 밟아본 풍수 전문가 정택민(鄭澤玟·49)이 필자에게 그 비급(祕笈)을 털어놓았다. 기원전 10세기부터 서기 1세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평양은 많은 사신이 왕래하며 머문 곳이었다. 따라서 연회(宴會)가 베풀어지기 일쑤였고, 이와 관련된 그림이나 시가 등이 많은 것도 당연하다. 대동강가의 연광정에는 고금의 많은 시인·묵객들의 작품이 걸려 있다. 중국 사신들이 오면 다른 시들은 모두 떼어내고 정지상의 「송인(送人)」만 걸어두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송인(送人)」은 우리나라 이별시의 백미로 평가되는 작품이다.이중환의 『택리지』에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명(明)나라 때 주지번(朱之蕃)이 사신으로 왔다가 연광정에 올라 큰 소리로 장쾌하다고 부르짖고
광양향교에서 간행한 『희양문헌집(曦陽文獻集)』희양은 광양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기 전의 명칭이다. 1938년 『희양문헌집(曦陽文獻集)』이라는 제목의 시문선집이 간행된다. 발간한 곳은 광양향교였다. 특이한 것은 1925년 『광양군지』가 발행됐는데, 이 책 역시 다른 지역의 지리지와 달리 지방 유림의 중심인 향교가 지리지의 발간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이 책 또한 나라 잃은 슬픔을 담아 광양 유림들이 가진 우국충절 의식을 반영해 고려시대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우리 지역과 관계된 시문을 모아 만든 것으로 보인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희양
광양 봉수에 대해 2개월 전 메탈봉수대 이설에 대한 글을 기고한 바 있다. 이번에 또 봉수건대산과 관련된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며칠 전에 무슨 기사를 찾고자 구독하고 있는 광양시민신문 2023년 12월 26일 자 「정밀 지표 조사, 봉대직가 찾아내는 일 ‘숙제’」란 제하의 글을 보고 그냥 지나치기에는 마음이 허락하지 않아 펜을 들었다.글을 쓰신 광양역사연구회 「마로희양」 이은철 대표는 광양 봉수에 있어 깊은 관심과 연구 활동을 통해 많은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세 번의 학술대회를 개최함으로써 광양시민에게 봉수에 관한 역사의식을
광양 향사당과 우산공원의 유림정국사편찬위원회 안영신 사료조사위원은 역대 광양 현감 중 선정을 베풀고 치적을 세운 인물로 문관으로는 박세후, 무관으로는 어영담을 꼽는다. 먼저 어영담(魚泳潭, 1532~1594)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도와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는 어영담이 물길을 잘 알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영담은 함안 사람으로 실제 돌산도에서 어부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물의 귀신’이었다고 한다. 어영담을 임발영이 창고에 쌓인 곡식을 문제삼아 파직시켰는데, 김두 등 126명이 연서를 통해 개인의 착복이 아니라 내
조선시대의 강학 공간조선시대는 반상이 구별되는 계급사회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이전인 조선 전기의 주인공은 사대부들이다. 사대부란 양반 관료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사(士)와 대부(大夫)가 합쳐진 말이다. 사(士)계층이란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가기 위해 공부하거나 벼슬을 그만두고 자연에 묻혀 속세와 거리를 두는 은일지사(隱逸之士)를 말한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에 사림파(士林派)들은 화를 입고 세력을 잃어 귀양을 가거나 지방으로 내려가 자연을 벗 삼아 풍류 생활을 했다. 조선시대 선비문화의 산실이 된 곳이 누정이다. 누정이란 누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