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제철소 30년을 되돌아 본다

광양제철소‘ 태동에서 신소재 생산’ 재도약까지
세계 경쟁력 1위 철강사‘ 포스코 광양제철소’
더 큰 도약을 향한 포스코의 도전은 계속된다

지난 1985년 당시 금호도와 태인도 일부, 그리고 광양만 앞바다를 포스코 제2공장 부지로 매립하기 위한 첫 삽을 뜬지 30년이 지났다.

87년 첫 쇳물을 생산한 광양제철소는 단위제철소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 현재는 매년 2100여만톤의 철강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또한 광양제철소의 광양시 입주는 전남 제1의 경제자립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데 가장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데 토를 달 수 있는 이가 없을 만큼 광양시와 광양사람들의 삶의 모습까지 바꿔 놓았다.

현재는 세계적인 철강경기 불황 속에서 고전하고 있지만, 광양제철소는 고급강위주의 고부가가치 철을 생산하는 등 새로운 대체 철강 소재로 불황을 이겨내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광양시민신문은 앞으로 1년여 동안 광양제철소의 태동에서 현재까지 30년 역사를 되돌아 보며, 앞으로 나아갈 길도 함께 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포항제철 제2공장 사업승인

정부는 1978년 10월 27일 제2제철 실수요자를 포항제철로 확정하고, 11월 1일 조강 연산 300만 톤 규모의 포항제철 제2공장 1기 사업계획을 승인했다.

포항제철소는 제2제철 실수요자로 공식 발표되자 제1가로림만, 제2가로림만, 아산만 세 곳의 지질조사 및 해상조사를 시행하고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2가로림만을 건의했다. 그러나 1979년 7월 24일 오후 박정희 대통령 주재로 최각규 상공부 장관, 고재일 건설부 장관, 박태준 사장 등이 참석한 청와대 회의에서 제2공장 입지는 충남 아산만으로 확정됐다.

아산만이 제2공장 입지로 확정되자 포항제철소는 1979년 8월 평택군 포승면에 제2공장 건설을 위한 건설사무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1980년 1월 초까지 정밀한 지질조사, 지형측량, 해상조사(海象調査), 보상물조사 등의 기초조사를 실시했다. 그런데 포항제철소는 이러한 기초조사를 통해 아산만이 제철소 입지로는 문제점이 많은 지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선 아산만은 간만의 차이가 심해 25만 톤급 선박이 출입하려면 대규모의 갑문 건설이 필요한데 갑문을 건설하려면 기술도 문제가 되고, 엄청난 자금조달도 장애요소가 될 수 있었다. 지질은 조류에 의해 미세한 부유물질이 가라앉아 형성된 퇴적층이어서 육중한 구조물의 축조와 중량물 야적이 필수인 제철소 입지로는 매우 불리한 점토질의 연약지반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10ㆍ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제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는 등 내우외환이 겹쳐 우리나라 경제는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추진 이래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는 등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에 따라 포항제철소는 아산만 지역이 제철소 부지로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1980년 1월 12일 아산과 서울에 주재하던 제2공장 추진팀을 철수시키는 한편, 4월 1일 팀을 해체하고 입지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 작업에 착수했다.

아산만으로 재확정

1980년 5월 박태준 사장은 당시 국가 재정 상태로 보아 정부가 아산만공업지구의 정부지원 사업비로 책정된 6717억 원을 회사가 필요로 하는 시기에 지원해 주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아산 외에 새로운 입지로 광양만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박태준 사장은 당시 전두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만나 광양과 아산을 비교해 줄 것을 건의했다.

전두환 상임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6월 20일 개최된 국보위 건설분과위원회에서 광양과 아산의 입지조건을 비교해 브리핑 하고 제2공장 입지로 광양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 위원회는 광양지역이 연약지반인 관계로 고려 대상이 될 수 없다며 회사의 안을 일거에 부결했다. 이 무렵 회사는 광양에 대한 충분한 조사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광양만이 입지로서 타당함을 기술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7월 7일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 주재로 제2공장 입지에 대한 심의회의가 열려 아산으로 재 확정됐다.

광양만 최종 확정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쳐 아산이 제2제철 입지로 확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산이 연약지반과 갑문 관계로 입지로 부적합하며 예산 부족으로 정부사업이 착수되지 않아 당초 예상하였던 1984년 준공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회사는 입지 재검토를 관계 요로에 요청하기 시작했다.

또 회사는 11월부터 독자적으로 광양만에 대한 조사계획을 수립하고 지질조사를 위한 특수장비와 시험기기를 확보하고 12월 16일에는 ‘임해기지 지반조사반’이라는 팀을 구성해 정밀 지질조사를 시작했다.

이후 박태준 회장은 아산과 광양의 부지조건이 경제적으로 유사하므로 입지 문제는 실수요자의 의견을 감안해 정책적으로 결정될 사안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결국 전두환 대통령은 1981년 11월 이미 포항제철소를 성공적으로 건설한 회사의 경험을 존중해 제2제철 입지를 광양으로 최종 확정했다.

이로써 1973년 3월부터 각축을 벌여 왔던 제2제철의 입지 선정 드라마는 8년 8개월 만에 광양만으로 매듭지어졌다. 입지확정 발표가 있자마자 전남도청 앞에는 대형 축하 아치가 세워졌고, 1981년 11월 12일에는 광양읍 광양농고 교정에서 많은 도민과 기관장이 참가한 가운데 농악놀이 등 경축행사가 벌어졌다.

광양만의 입지

입지 선정 당시 광양만 해면에는 광활한 간석지가 형성되어 있고 면적도 충분해 제철소 부지로서 합당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섬진강 하구에는 양질의 모래를 함유한 넓은 사주(砂洲)가 형성되어 있고, 인근 지역에 섬들이 산재해 있어 이러한 양질의 토사를 이용하면 준설매립을 단기간에 끝내는 것이 가능하였고, 섬의 석재를 활용하면 호안축조도 경제적으로 할 수 있었다.

항만조건을 보면, 인근의 여천공업단지에 25만 톤급 선박의 입ㆍ출항이 가능하고 또 수심 20~25m의 자연수로가 형성되어 있어 제철소 전용항만으로 개발하기에 용이하며, 특히 정박지(碇泊地)의 수심을 확보하기 위해 준설한 토사를 전부 부지조성에 사용할 수 있으므로 경제적으로 대형선박을 수용할 수 있는 천혜의 항만조건을 갖추었다.

공업용수는 여천공단을 위해 이미 건설한 수어천댐의 급수능력이 하루 25만 톤인 데 비해 실제 사용량은 하루 14만 톤 이내여서 하루 11만 톤의 여유 능력을 이용할 수 있으며, 섬진강 양수장을 확장하면 하루 55만 톤의 용수를 공급할 수 있어 용수 면에서 볼 때도 입지조건이 대단히 양호했다.

공장위치 확정

정부가 1981년 11월 4일 광양만을 회사의 제2공장 입지로 확정하자 회사는 12월 1일 부지조성을 비롯한 제철소 건설을 추진하기 위해 선발대 48명을 현지에 파견했다. 이들은 광양군 진월면 사무소 앞마당에서 간단한 사무실 개소식을 가졌다. 이들 선발대원들은 망덕에 있는 수산업협동조합 건물의 2층(13평)을 임대해 임시 사무실로 쓰다가, 금호도 안의 구 삼애중학교 건물을 개조해 1982년 1월 4일 시무식을 갖고 본격적인 업무를 시작했다.

1981년 11월 4일 제2공장의 입지가 광양만으로 결정된 후 1982년 4월 부지조성 기본설계와 제철소 항만 기본설계에서 부지외곽 좌표와 항만법선이 확정되었고, 1984년 초 연관단지 및 대규모 원자재 유통기지(CTS : Central Terminal System) 사업계획이 추가되면서 공장배치계획은 현재의 레이아웃으로 최종 확정되었다.

광양제철소는 국내 최초로 바다 위에 건설하는 공장인 만큼 공장배치를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부지를 정하였을 뿐 아니라 공장 건설 시 단계별로 공장을 확장할 수 있도록 부지를 확정했다.

제철소 부지의 면적은 총 1488만㎡(약 450만 평)였는데, 공장부지가 1015만㎡였고, 준설매립 시 불량토를 저장한 수토장이 263만㎡, 지원시설 기지 및 주택단지가 210만㎡였다.

부지매수와 주민이주

금호도 전부와 태인도 일부가 포함된 사업계획이 윤곽을 드러내자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주민의 이주와 보상, 어업권보상 문제가 대두됐다.

보상업무는 대체로 용지매수, 분묘이장, 어업권보상, 주민이주 업무로 구분해 추진했는데, 이들 업무는 주로 주민들과의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조상 대대로 삶을 영위해 온 생활의 터전을 떠나도록 주민을 설득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1982년 9월 보상금 지급을 완료했다.

1982년 7월 16일 건설부 고시 제266호로 광양군 광영리 일대 129만㎡가 이주민의 배후 주거지역으로 확정된 후 용지매수가 완료되고 12월 14일에는 택지조성공사가 착공됐다.

또 1983년 1월 28일 개별 이주를 희망하는 42가구를 제외한 금호도의 이주 대상 262가구에 대해 택지조성 조감도에 따른 개별 택지 위치를 추첨으로 확정했다. 그리고 금호도 이주민의 자체 주택건립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주택 건립에 착수했다. 이후 8월부터 10월에 걸쳐 전원이 이주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제철소 건설에 매진할 수 있었다.

호안축조와 준설매립

포항제철소는 1982년 9월 28일 총연장 13.6㎞의 거대한 제방을 축조하는 호안축조 공사를 착공했다. 공사는 11월 12일 완료되어 총연장 13.6km의 호안을 육로로 완전히 개통하고 11월 14일 최종 호안 연결식을 가졌다.

연인원 23만 1143명, 장비 6만 8430대를 동원해 철야작업을 한 끝에 회사는 당초 계획보다 무려 9개월을 앞당긴 1984년 9월 30일 호안축조 공사를 완공했다. 이와 같은 공기단축은 광양 1기 설비의 조기 착공에 크게 기여했다.

준설매립 공사는 호안공사 착공 5개월 후인 1983년 2월 28일 착공해 호안공사와 병행 추진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회사는 1984년 11월 30일 광양 2기까지의 설비, 지원시설, 주택단지 부지 등 230만 평 매립을 1단계로 완료했고, 이어 1985년 4월 30일 3ㆍ4기 설비 건설 예정지역, 9월 20일 업무단지 조성지역 매립을 차례로 완료했다. 이 공사에는 연인원 30만 6655명이 동원되고, 장비 9572대가 투입됐다.

연약한 땅을 제철소를 건설할 수 있는 양질의 부지로 바꾸는 과정을 연약지반 개량이라고 한다. 그 원리는 느슨한 상부 모래층의 상대밀도를 증대시키고 중부 점토층을 안정시키기 위해 모래말뚝(Sand Drain) 또는 모래다짐말뚝(Sand Compaction Pile)을 박고 토사로 하중을 가해 흙 속에 포함된 물을 강제로 뽑아냄으로써 토사의 지지력을 증대시키고 침하시간을 단축하는 것이다.

광양 1기 연약지반 개량공사는 1984년 1월부터 1986년 10월까지, 2기는 1985년 5월 1일부터 1988년 3월 30일까지 시행했다.

포항제철소는 광양 1기 및 2기 연약지반 개량공사를 시행하면서 기술자립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 결과 설계, 침하안정관리 등의 시스템을 개발해 광양 3기와 4기 지반개량 공사는 자체기술로 시행했다.

사회간접자본 건설 지원

정부는 1981년 11월 4일 제2제철 입지를 광양만으로 확정하고 도로, 공업용수, 항만, 인입철도 등 제철소 건설과 조업에 필요한 각종 사회간접자본 건설 지원 체제를 확립해 정부사업을 추진했다. 정부는 1982년 5월 6일 제1산업도로를 착공해 1983년 6월 24일 개통했고, 광양제철소의 설비 확장에 따른 물동량 증가에 대비해 1991년 3월 진월인터체인지와 태인도를 연결하는 4.5㎞의 제2산업도로를 착공해 1994년 12월 말 개통했다.

공업용수는 1983년 4월 2일 송수관로 공사를 착공해 수어천댐 하류 5.8㎞ 지점의 옥곡에서 분기해 1984년 12월 31일 통수했다.

제철소 건설 자재 반입을 위한 물양(物揚)부두는 1983년 7월 20일 착공해 1985년 8월 준공했다. 그리고 1987년 3월 말 초대형 원료선박의 접안이 가능하도록 폭 350m의 항로 준설공사를 완료해 4월 8일에는 철광석 25만 톤을 실은 원료선이 원료부두에 접안했다.

인입철도는 1985년 7월 1일 착공해 1987년 9월 22일 19.7㎞ 구간을 개통했다. 제품부두는 1987년 7월 20일 착공해 1988년 11월 준공했다. 이들 정부사업에는 총 2720억 3700만 원이 투입됐다.

광양시는 제철소가 들어서기 전인 1982년 인구 7만 8천여 명의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었으나, 광양제철소 건설과 더불어 도시화와 공업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대표적인 신흥 공업도시로 성장했다.

광양제철소 건설 전과 2015주요 통계를 비교해 보면, 인구는 15만 2천명으로 1.9배 증가했고, 재정규모는 59억원에서 5720억 원으로 96배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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