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제철소 30년을 되돌아 본다

광양 1기 설비 준공 국내 철강 자급도 85%까지 향상
건설현장 연인원 544만명, 각종 장비 18만대 동원
4천억원 부가가치 유발, 4천만 달러 국제수지 개선
1조9천억원 타산업 생산 유발... 국내ㆍ광양 발전 기여


▲ 1987년 광양 1고로 첫 출선
지난 1985년 당시 금호도와 태인도 일부, 그리고 광양만 앞바다를 포스코 제2공장 부지로 매립하기 위한 첫 삽을 뜬지 30년이 지났다. 87년 첫 쇳물을 생산한 광양제철소는단위제철소로는 세계 최대 규모로 현재는 매년 2100여만톤의 철강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또한 광양제철소의 광양시 입주는 전남제1의 경제자립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데 가장 커다란 역할을 했다는데 토를 달 수 있는 이가 없을 만큼 광양시와 광양사람들의 삶의 모습까지 바꿔 놓았다. 현재는 세계적인 철강경기 불황 속에서고전하고 있지만, 광양제철소는 고급강위주의 고부가가치 철을 생산하는 등 새로운 대체 철강 소재로 불황을 이겨내려는 노력들을 하고 있다. 광양시민신문은 앞으로 1년여 동안 광양제철소의 태동에서 현재까지 30년 역사를 되돌아 보며, 앞으로 나아갈 길도 함께 조명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 1984년 5월21일 박태준 회장 열연설비 1차 기본회의 보고

광양 1기 사업계획 승인

1977년 정부는“ 중화학공업 건설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됨에 따라 철강재 수요가 크게 늘어 포항제철소의 생산만으로는 공급이 부족해 제 2종합제철의 건설이 불가피하다”는 발표를 하게 된다.

당시 한국의 1인당 철강소비량과 한 나라의 사회간접자본 구비수준을 나타내는 1인당 철강 축적량은 선진국의 10분의 1 수준으로 낮았고, 중화학공업 건설이 본격화 되면서 향후 우리나라의 철강수요는 대폭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에 정부는 철강산업에 대해 높은 성장 잠재력을 확신하고 철강산업 육성을 위한 제2제철 건설을 추진했던 것이다.

정부는 1978년 10월 27일 포항제철소를 대한민국 제 2제철 실수요자로 선정하고, 11월 1일 포항제철소의 광양 1기 사업계획을 승인했다.

▲ 1985년3월4일 제철초 건설 현장 전경
회사는 1985년 1월, 설비공급사, 건설회사 등 국내외 40여개 업체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회의를 열어 1985년 3월 5일 착공,1987년 6월 30일 준공하는 것으로 목표를 세웠다.

▲ 1985년11월2일 1고로 1제강 건설 현장
이때 확정한 1기 사업의 기본방향은 △사업 규모 : 조강 연산 270만 톤 △소요 투자비 중 착수금과 내자는 포항제철소의 자금으로, 조달 착수금을 제외한 외자는 차관으로 조달 △高생산성, 자원절약, 품질향상, 공해방지 위해 최신설비와 기술의 적극적인 도입 등이었다.

세계철강업계 불황이 기회

어렵사리 1985년 3월 5일 착공결정을 했지만 착공시기에 맞춰 설비공급처를 확보해야 하는 등 여러가지 많은 어려움들이 존재했다.

▲ 광양제철소 1기 사업 현장 모습
그러나 당시 세계 철강업계는 2차 석유파동 이후 극심한 불황에 빠져 있어서 설비확장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태준 회장은 무슨 일이 있어도 광양제철소는 계획대로 건설한다는 결단을 내리고 미국과 유럽을 방문해 광양제철소 건설의 타당성을 설명하고 협력을 요청했다.

마침 세계철강업계 불황으로 수주가 없어 고전하던 설비제작업체들은 큰 기대와 환영을 뜻을 내비쳤으며, 이에 예상치 못한 미국과 유럽 설비업체들의 호의적인 반응에 충격을 받은 일본 설비업체들도 뒤늦게 협력의지를 내비쳤다.

이로써 광양제철소는 각국 업체들의 경쟁입찰을 유도해 당시 세계최신예 설비를 저렴한 가격과 유리한 조건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제철설비 국산화 노력

광양제철소는 국가경제 성장을 위해 제철설비의 국산화에 대해서도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한국의 기계공업 수준은 제철설비를 제작하기에는 다소 미흡한 점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양제철소는 국내 기계공업을 조속히 육성하기 위해‘ 광양 1기 사업 설비’ 국산화율을 40% 수준으로 정하고 총 4억 달러 상당의 국산설비를 구입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광양제철소는 국내 기계공업을 성장시킴과 동시에 1기 설비를 국내에서 최대한 구매하면서 일본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낮추었을 뿐 아니라, 개발도상국이 제철설비 구매 시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인 수의계약 형태도 경쟁입찰 형태로 전환한 계기를 마련했다.

드디어 착공이다

광양제철소는 ‘21세기를 겨냥한 최신예 제철소 건설’이라는 슬로건 아래 1985년 3월 5일 270만 톤 체제의 1기 설비 공사를 착공했다.

광양제철소 건설현장에는“ 포항에서 쌓은 기술 광양에서 꽃 피우자”라고 적힌 대형 아치를 세우고 건설역군들의 사기를 독려했다.

그러나 열악한 공사 작업환경은 건설역군들을 수많은 난관에 부딪치게 만들었다.

특히 연약지반 위에서 하는 공사는 최대 난점이었다.

연약지반 때문에 무거운 장비들이 뻘 속에 가라앉아 전복되는 등 공사 초기부터 난항이 계속됐던 것이다.

▲ 광양제철소 1기 사업 현장 모습
하지만 많은 직원들은 며칠 밤낮을 끊임없이 연구한 끝에 케이슨 하부 암반에 스틸파일을 박은 후 콘크리트를 타설하며 침하시키는‘케이슨 공법’을 적용해 이를 극복해냈다.

또한 공사 초기에 골재가 부족해 현장에서 무려 100㎞나 떨어진 거제도 등지에서 운반해오기도 했다.

장거리 운반으로 인해 골재비용이 비쌀 뿐 아니라 대량수송도 어려워지자 광양제철소는 섬진강의 모래 및 제철소 부지 인근의 석산을 개발해 사용하는 등 난제를 해결해 가며 공사에 박차를 가했다.

이와 같이 초기의 열악한 건설 여건에서도 건설요원들이 불철주야 흘린 땀으로 1987년 종합준공을 향해 열심히 나아갈 수 있었다.

종합준공이 보인다

준공을 약 100일 앞둔 1987년 1월 22일, 광양제철소 조업용 철광석 분광 12만 톤을 선적한 대양하니호가 처녀 입항하고, 4월 8일에는 세계 최대의 철광석 운반선인 25만 톤급의 현대 자이언트호가 원료부두에 입항하는 등 종합준공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갔다.

쇳물이 생산되면 즉시 반제품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먼저 건설한 열연공장은 2월 28일 준공됐으며, 3월 2일에 액체상태의 철을 고체로 만드는 연주공장이 준공되고, 3월 24일 산소공장, 3월 31일 가스 설비, 철도설비 등 관련 시설들이 잇따라 준공됐다.

아시아 최초의 영국식 고로인 1고로는 4월 24일 화입해, 하루 뒤인 4월 25일 순조롭게 첫 쇳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꿈의 제철소 완성

당초 계획보다 6개월 앞선 2년 2개월 만인 1987년 5월 7일, 조강 연산 270만 톤 규모의 광양제철소 1기 설비가 종합 준공됐다.

1기 설비는 대형고로(내용적3800㎥)를 비롯해 제강공장, 연주공장, 열연공장 등 10개 공장과 항만하역설비 등 14개였으며, 총 1조 6천억원이 넘는 대규모 공사비가 투입됐다.

총 투자비의 70%에 해당하는 금액은 회사가 자체 조달했다.

▲ 박태준 회장 현장 순시
▲ 광양 1기 준공
준공식에서 박태준 회장은 경과보고를 통해“ 광양제철소는 세계 최첨단의 기술과 설비로 건설했다.

이로써 포항제철은 기존 포항제철소를 합쳐 1사 2소 체제에 의한 1180만 톤의 조강생산 능력을 보유해 자유세계 5위의 제철소로 부상하게 됐다”며“ 앞으로도 포항제철은 축적된 기술과 경험을 바탕으로 광양제철소와 포항제철소를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제철소로 키워 나가는 한편, 증대하고 있는 국내 철강재 수요에도 효율적으로 대처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광양 1기 설비의 톤당 건설단가는 브라질, 타이완 등 외국 제철소의 건설단가보다도 저렴한 723달러로, 이같이 낮은 건설단가는 광양제철소의 국제 경쟁력을 보장하는 결정적인 요인의 하나가 됐다.

광양 1기 설비 준공으로 국내의 철강 자급도는 85%까지 향상됐으며, 이러한 국가경제 발전을 위한 건설현장에 연인원 544만명과 각종 장비 18만대가 동원됐다.

▲ 박태준 회장 현장 순시
한편, 정부는 광양 및 인근지역에 총 2050억 원을 투입해 항만,철도, 도로, 용수 등의 사업을 적기에 제공하며 지역발전과 제철소 건설에 큰 뒷받침 역할을 했다.

또한 철강이 기초소재를 공급해 관련 산업에 기여도가 큰 산업답게 1조9천억원의 타산업 생산 유발효과, 4천억원의 부가가치 유발효과, 4천만 달러의 국제수지 개선효과도 거둘 수 있게 됐다.

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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