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늬의 풀잎에 드는 햇살

아이들이 여름방학을 맞아 어스틴 이모네로 놀러갔다. 거의 세 달이나 되는 길고도 긴 방학을 아이들이나 나나 당해낼 재간이 없기에 보따리를 싼 것이다. 이민와서 줄곧 어스틴에 살았으므로 이사오기 전 잘 지내던 한국 친구들이 거의 거기 있어 덜 무료할 거란 판단에서다.

가방을 꾸려주면서도 공연히 안쓰러워 안 해도 될 잔소리를 거듭거듭하는데 녀석들은 에미맘은 아랑곳 없이 들떠서 나름대로 준비하느라 부산하다. 큰 아이는 평소보다 목소리가 서 너 배 높아진채 딴엔 자기들 끼리만 떠나는 게 미안했는지 그 어느 때보다 깍듯하게 경어를 쓰며 사근사근하게 군다. 작은 놈은 내일 아침 출발한다는데도 벌써부터 베개를 옆구리에 끼고 찜통같은 차에 가서 누워 있다. 녀석들은 외로웠던 것이다. 녀석들이 사는 곳은 마음만 먹으면 버스를 집어타고, 영화도 보고, 친구도 만나고, 떡볶이도 사먹고 희희낙낙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만만한 우리나라 좋은나라 대한민국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친구집에 갈래도, 연필 한 자루를 살래도 누군가 태워줘야만 움직임이 가능한 넓고 넓은 미국 땅에 오막살이 집 한 채 철모르는 딸 아들인 것이다. 그들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어른들의 차는 먹고 사느라 바빠 호락호락 시간을 내주는 것도 아니고 오직 학교에서 집, 집에서 학교 사는 게 늘 그 날 그 날인 아이들은 소리내어 말은 안했지만 아니, 말할 수 없이 외로웠던 모양이다. 그 이쁘고 푸른 나이에.

아이들이 떠난 집은 텅 빈 절간처럼 고즈넉하다. ‘싸라락’ 무심결에 밟은 과자껍질 소리가 우뢰처럼 크게 들린다. 칠칠치 못한 작은 놈이 흘려 놓았겠지.

화분에 물주러 가는 길이었는데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내가 뭐하러 왔더라’ 한참을 서성인다. 과자 껍질을 손에 꼬옥 쥐고서… 퇴근해 들어온 남편도 반기는 아이들로 늘 벅썩거리던 집이 착 가라앉아 영 낯선 모양이다. 마치 손님처럼 데면데면하게 굴며 하릴없이 애들 빈방에 들어가 의자에 앉아보기도 하고, 컴퓨터 자판도 두들겨 봤다가, 잘 정리된 침대카바를 공연히 들썩거려 쓱쓱 손질하기도 한다.

이상도 가치관도 마치 내 전생의 쌍둥이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척척 죽이 맞아 아이 안 낳고도 둘이서 깨 쏟아지게 잘 살 것 같던 연애시절도 있었는데 달콤한 아이 맛을 이미 봐버린 우리 부부는 마약 중독자처럼 맥을 못추고 벌써부터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꾸역꾸역 시간은 갔다. 약속했던 한 달의 시간이 다 지난 것이다. 녀석들 실컷 놀기만 했으니 이제 돌아와서 미처 못했던 일도 하고, 다른 계획들도 실천해야겠지. 아이들 데리러 갈 생각에 머리도 조금 자르고 싸구려지만 옷도 한 벌 사입었다.

남편이 싱글거리며 “뭔 일이지. 생전 안 사던 옷을 다 사입게! ” 아픈 데를 쿡 찌른다. 출발하기 전, 미리 짐도 챙기고 준비하고 있으라고 언니네로 전화를 했다. “애들아. 엄마 내일 올라 오신대. 준비해라” 전화하다 말고 옆에 있는 애들에게 이모가 희소식을 전해 준다.

동시에 ‘꺅’ 터지는 소리! ‘짜식들 되게 좋아하는군’ 내심 흐뭇해하고 있는데 뒷통수를 치는 언니 말씀. “야, 너 혹시 계모 아니냐? 아무도 몰래 니새끼들 아니라고 막 구박했지? 엄마가 온다는데 좋아하기는 커녕 꺅 소리지르며 금방이라도 니가 잡아갈 것처럼 방으로 내뺀다. 니네 애들 정말 이상하다” 난 짝사랑하다 마음을 들킨 것처럼 몹시 무안해져 ‘그러게’ 얼버무리며 딸아이를 바꿔달래서 서운함을 감추지 않았다. “하나라! 니넨 엄마가 간다는데 반기기는 커녕 왜 그리 질색을 하니? 이 배신자들 정말 그러기야!” “우헤헤헤. 엄만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인데 감히 어떻게 배신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어요.

단지,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서… 좀더 있다 오실 거죠? 일주일만 더 네?” 딸아이는 내 비위를 맞추느라 너스레를 떤다. 암만 그래도 서운하다. 지들 속마음까지야 안 그렇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조직(가정)을 이탈한 지 벌써 몇 주 짼데 이 배신자들 돌아오기만 해봐라.
조직의 쓴 맛을 보여 줘야지. 그러면서 난 아이들이 좋아하는 장조림이며 게장이랑 밑반찬을 잔뜩 만들어 놓고 있다. 배신자들의 남은 여름을 위해!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