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희망이다’ - 김광희 광양보건대학교 교수

언제부터인가‘ 아르바이트’라 부르던 시간제 부업을 줄여서‘ 알바’라고 한다. 과거에는 아르바이트가 대학생들과 연관되는 말이었으나 요즘에는 아르바이트의 계층이 따로 없다. 고깃집 숯불을 나르는 고등학생, 박스와 폐지를 줍는 노인, 여기에 정상적인 본업을 마치고 야간이나 주말에 다른 부업을 해야 하는 사람들까지 보탠다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알바 인생’을 살고 있다.

방학을 맞은 우리 집 아들 녀석이 아르바이트를 해보겠다고 나섰다. 편안한 휴식과 즐거운 인터넷 게임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루 8시간씩 매일 일해야 하는 부담을 스스로 짊어졌다. 첫날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의 표정에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감과 함께 후회스러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인생을 배우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아들에게 일해 볼 것을 권유하였던 나였지만 아이의 지친 모습을 보니 이내 안쓰러운 마음이 밀려왔다.

아르바이트가 우리 언론에 기사거리로 등장한 것 중 가장 이른 것은 1954.12.30. 경향신문 기사인 것으로 검색된다. 이날 지면에는‘ 피를 팔고 사환(使喚)해가며 진지히 공부하는 고학생 모습’이라는 제목을 달고 어려운 형편에서 학비를 벌기 위해 신문을 팔거나 찹쌀떡과 메밀묵 혹은 우유를 파는 학생들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널려 있었던 당시였기에 먹고 살기도 버거웠을 터이지만, 그럼에도 공부를 하고자 하는 마음 하나만을 붙잡고 온갖 삶의 고초를 온몸으로 견뎌냈던 학생들이 지면을 통해 전해졌다. 기자는 기사문의 말미에‘ 고학생의 눈물겨운 실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국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강구하지 못하고 있는 딱한 실정에 놓여 있다’고 전함으로써 학생들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과거 7080시절의 아르바이트는 향학열에 불타는 대학생들을 비유하는 환유적 표현이기도 했다. 대학이 보편교육이 되지 못했던 때에 대학생은 지성인의 상징이었고, 대학공부를 위해 아르바이트 하는 일은 대학생의 상징이자 특권처럼 여겨졌었다.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것으로 기죽을 일도 없었다.

그러나 2016년 오늘의 아르바이트는 점점 생존을 위한 삶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지금은 학비를 벌기 위한 아르바이트 외에도 일자리를 얻지 못해 비자발적으로 아르바이트에 나서고 있는 청년들의 수도 점차 늘고 있다.

올해 초 세계일보는 시간제 근로의 비중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는 보도를 내놓기도 했다(2016.1.10.). 2005년 22.8%에 불과했던 시간제 비중이 2015년 46.3%로 2배 이상 증가했는데, 취업이 어려워진 청년들이 어쩔 수 없이 음식․숙박업소 아르바이트 등 시간제 일자리를 선택하면서 나타나는 것으로 기사에서는 그 이유를 설명했다. 또 직군별로는 청년 임금근로자 가운데 80%가 서비스업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데, 2015년 8월 기준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청년 임금근로자 38.5%가 비정규직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도됐다. 작년에는 처음으로 정부에서 아르바이트 종사자 수를 공식 집계한 바 있다.

작년 통계이기는 하지만 아르바이트 근로자는 101만2640명으로 2009년(88만7221명)보다 12만5419명(14.1%)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이 가운데 학업을 병행하는 청년 아르바이트 근로자는 60만7142명,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직장인은 20만5383명, 가사를 병행하는 여성 아르바이트 근로자는 20만115명으로 집계됐다(한국경제 2015.3.15.).

아르바이트 근로자 100만 명 시대. 일시적 아르바이트에서 직업적 아르바이트로 전환되는 상황을 고려한다면‘ 알바 인생’이라는 자조적 표현이 지나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우리를 더 가슴 아프게 한다. 칼럼을 쓰고 있는 이 시각 방송 뉴스는‘ 알바노조 조합원들이 최저임금 1만원 인상을 촉구하며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에 올라가 기습시위를 벌이다 경찰에 연행됐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1954년 아르바이트 하는 고학생의 눈물을 당국에서 나서서 닦아주기를 바랐던 그 보도 공간에 지금은 최저임금 1만원을 바라는 아르바이트생들의 눈물을 전하고 있으니 시간의 간격을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착잡함이란 매 한가지이다.

좋은 일자리 창출이 더 이상 정치권의 헛된 공약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 전체가 머리를 맞대고 일자리의 양적․질적 개선을 고민해야 한다. 이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 우리 기성세대가 해야 하는 가장 현실적이며 절실한 과업이다.

학생과 청년층의 아르바이트 형태의 구직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 말고도 우리를 더욱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청소년들의 일부가 노동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저임금은 취약 노동계층을 위해 우리 사회가 합의한 최소한의 보호장치이다. 그러나 일부 사용자들은 작업의 난이도를 따져 시급을 최저 수준 이하로 조정하려 하거나, 정당한 보수를 요구하는 아르바이트 근로자들에게 싫으면 그만두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최저 임금이 인상되자 아파트 경비원 수를 감원했다는 어느 아파트 자치회의 이야기는 그저 가십거리로 넘겨듣기에는 몹시 불편한 우리 사회의 노동 인권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기도 하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과 청년들도 엄연한 근로자다. 근로기준법에서는 이들을 모두 근로자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법에서는 계약서 작성, 최저임금 보장, 근로시간 준수, 휴식 제공 등 몇 가지 조건을 사용자에게 요구한다. 그것은 사용자나 근로자가 모두 동등한 인격을 지닌 존귀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 근로자를 고용하는 것은 단순히 노동력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격과 자질을 얻어 사용자의 부족한 힘을 채우는 일이다.

그러므로 합당한 대가와 마땅한 처우가 뒤따라야 함은 당연하다. 사람을 단순히 노동력 제공의 수단으로만 보고 비용 환산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천부적 인격에 대한 모독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모든 사람이 천하보다 귀한 존재이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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