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이 사라져가는 시대, 전통의 맥 이어가는‘ 박종군 장도장’

“‘장도’는 광양의 뿌리문화 산업, 이제는 되찾아야 할 때”
장인의 땀 한 바가지와 맞바꾼 장도 한 자루



세월에 낯설어진 것들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어릴 적, 친구 집에 가면 거실 한 가운데 커다란 액자가 걸려 있곤 했다. 그 안에는 흰 도화지에 검은 글씨로 새긴 문장이 깃들어 있었다. 집집마다 마음에 새기는 단 하나의 문장, 바로 가훈이었다.

요즘 우리가 신체 일부마냥 스마트 폰을 지니고 다니는 것처럼, 우리는 한 때 좌우명이라는 보이지 않는 신념을 마음속에 지니고 다녔다. 그러나 지금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들, 무(無)형의 것들은 그 이름대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 돼 버렸다. 보이지 않는 것들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갈망하게 됐다. 정신은 사라지고 물질만 남아버린 오늘날, 그 잃어버린 신념을 찾기 위해 지난 16일 장도박물관을 향했다.

장인의 숨결을 훔치다

박물관에서는 박종군 관장(국가무형문화제제 60호 장도장 보유자)이 시민들에게 장도 만드는 과정을 시연하고 있었다.

▲ 두드리고

1200℃가 넘는 불에 강철을 달궈 수천 번, 수만 번 두들기면 그 단단하던 칼날이 조금씩 장인의 뜻에 따라 제 모양을 바꿔간다. 오랜 담금질로 칼이 될 자격을 갖춘 강철을 도마에 놓고 갈기 시작하면, 검은 쇳가루에 묻혀있던 은빛 칼날이 조금씩 제 모습을 드러낸다.

▲ 벗겨내고

그 다음, 10년 세월의 바람을 맞으며 단단하게 마른 흑단나무 칼집에 쇠꼬챙이를 꽂아 구멍을 낸다. 줄을 매단 활을 앞으로 당기고, 뒤로 당기며 조금씩 나무의 속살을 밀어내는 것. 이어 계곡에서 떠온 거친 모래를 떨어뜨려 장식이 될 은을 깨끗이 씻어낸다. 반복 또, 반복. 그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면 이젠 섬세한 정신을 깃들일 차례다. 칼날에 구멍을 내고 얇게 포를 떤 은을 북두칠성의 별로 새긴다. 완성된 칼은 옥으로 된 칼집을 만나 한 자루의 첨자도로 탄생한다.

장인이 흘린 한 바가지의 땀과 맞바꾼 귀한 칼이다.

문화재청의 제안으로 시작한 장도 시연은 베일 속에 감춰져 있던 예술가의 은밀한 작업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다. 장도라면 여자들이 자결을 결심하며 꺼내들던 은장도밖에 몰랐던 시민들은‘ 일편심(一片心:평생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장도의 참뜻을 배워갔다.

박종군 관장은“ 장도는 광양의 뿌리문화 산업”이라며“ 전통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었던 시민들에게 기회를 제공해 장도가 좀 더 친숙한 문화로 다가갔으면 하는 마음”이라고 소망했다.

장인정신의 맥을 잇다
▲ 갈고


박종군 관장은 대한민국 1대 장도장 명예보유자인 故박용기 옹의 제자이자, 아들이다. 대를 이어‘ 장도’라는 가업을 잇고 있는 것. 그리고 이제 흰머리가 자라는 그를 따라 두 아들이 맥을 이으려 장도 정신을 배우고 있다.

보통 자기 직업만큼은 자식이 물려받지 않았으면 하는 요즘 세태와는 확연히 다르다. 일본의 경우, 10대째 맥을 잇는 장인들을 쉽게 볼 수 있지만 지금 우리나라에는‘ 잇다’라는 가치가 퇴색된 지 오래다.

박 관장은“ 문화를 지켜나가는 민족성이야말로 선진국으로 가는 원천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며“ 부모를 빛내기 위해, 부모를 더 나은 작품을 남기기 위해, 가업을 발전시키는 자식들이 이 더 많아져야 한다”며 전통가업 소외의 문제를 지적했다.

또“ 요즘은 스승의 정신세계를 잇는 장인정신보다는, 성공을 위해 기술만 배우려는 이들이 많다”며“ 스승과 제자 서로를 빛내주는 것이 이 시대 진정한 장인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 씻어내고

박 관장은 기술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익힐 수 있는 것이지만, 장도에 새겨 넣는‘ 정신’은 누구나 할 수 없는 일이라 말한다. 그‘ 정신'이야말로, 자기희생을 통해 보람을 찾는 장인이 가져야할 필수 요소다.

쇳물에는 광양의 역사가 녹아있다

박종군 관장은 광양의‘ 장도’가 세계 일류가 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단언한다.

▲ 새기고

박 관장은“ 제철소가 들어오면서 광양이 신생도시 이미지가 짙어졌지만, 이제는 광양의 진짜 모습을 되찾아야 할 때”라며“ 뿌리 깊은 역사문화를 방치하고 버렸던 지난날은 잊고, 지금이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지자체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전통 가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의‘ 산업 응용’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장인이 직접 시장에 뛰어들기에는 어려운 현실을 감안, 경제적 어려움에 치여 장인들이 넘어지는 일이 없도록 국가가 체계적인 수요 시장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 장인은 수십 년을 갈고 닦아온 기술과 혼을 담아 예술 작품을 만들고, 여기에 산업이 뒷받침해 시장을 넓혀가 준다면 우리나라의 장인 문화는 한층 더 밝아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 붙이면

무기로서의 칼이 아닌 정신을 새기는‘ 칼’로서 한국을 대표하는 장도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박종군 관장은 야심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포스코의 지원을 받아 전통방식을 고수한 세상에 하나뿐인 ‘보검’을 만드는 것. 이는 푸른빛의 옥으로 칼집을 만들고, 그 위에 순금으로 장식을 더한 칼로 원재료만 해도 5천만원 상당에 이른다. 9월 중으로 작품이 완성되면 보검을 가지고 중동 두바이를 방문해 한국의 멋을 널리 알릴 계획이다.
▲ 한 자루의 신념이 만들어진다


박 장관은“ 보검이 완성되면 장도박물관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라며“ 장인으로서 꿈이 있다면 해외시장을 개척해 우리나라 장도가 세계적인 명물이 돼 외부인들이 광양을 절로 찾도록 만들고 싶다”고 깊은 소망을 내비쳤다.

누군가를 해하거나, 정복하기 위한 것이 아닌 마음을 가다듬고 올곧은 지조를 지키기 위해 지녔던 칼‘ 장도’. 신념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한 줌 칼에 정신을 새기며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박종군 관장. 그의 장인정신은 녹슬지 않는 금장식처럼, 앞으로도 많은 세월을 굳건히 버텨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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