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권 인문학강사

춘추오패 가운데 하나인 초(楚) 장왕(莊王)이 투월초의 난을 평정한 후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위로하기 위해 궁중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군신 간에 격의 없이 거나하게 취할 무렵 갑자기 촛불이 꺼져 실내가 아주 깜깜해졌다.

그때 돌연 장왕의 애첩이 소리쳤다.“ 어떤 무엄한 놈이 감히 음탕한 짓을 하는 것이냐? 내가 지금 그자의 갓끈을 떼어 가지고 있으니 왕이시여! 불을 켜고 그자를 색출하소서.”

하지만 장왕은 불을 켜지 못하게 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모두들 갓끈을 끊어라! 오늘밤은 과인과 더불어 마음껏 마시는 날인데 만일 갓끈을 끊지 않는 자가 있다면, 나와 노니는 것이 즐겁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리라.”

이에 모든 신하들이 앞 다투어 각자의 갓끈을 끊어버렸다. 그 때문에 불을 켠 후에도 누가 그런 무례한 짓을 했는지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후 2년 뒤, 진(晉)나라와 큰 싸움이 벌어졌는데, 한 장수가 죽음을 무릅쓰고 용맹스럽게 싸웠다. 그 덕분에 초나라는 5번을 싸워 5번 모두 이겼고, 마침내 초 장왕은 패자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장왕이 그를 불러 공을 치하하자 그 장수가 엎드려 죽을죄를 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신은 이미 진즉 죽었어야 할 몸입니다. 연회가 있던 바로 그날 밤 소신은 술에 취해 그만 무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소신의 죄를 용서해주신 대왕의 은혜에 그저 보답코자 했을 따름입니다.”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편찬한 역사고사 모음집《설원(說苑)》에 나오는‘ 절영지연(絶纓之宴, 갓끈을 끊고 연회를 계속하다)’의 고사이다.

세상에 어려운 일이 참 많겠지만, 다른 사람의 진심어린 마음을 얻은 것만큼 어려운 일도 드물 것이다. 물론 자신이 가진 물리적 위력이나 경제적 힘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잠시 움직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건적이고 한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조건과 상황이 달라지면, 다시 말해 그 힘이 떨어지고 더 이상 경제적 이득이 생기지 않으면 그의 영향력도 거기서 끝나고 마는 것이다.

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보통의 방법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먼저 자신도 상대방에게 진심을 다해야 하고 때로는 상대방이 상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관용과 포용의 미덕을 보여주어야 한다. 초 장왕이 그랬던 것처럼.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Shaw)의 희곡《 시저와 클레오파트라》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로마의 패권을 두고 정적 폼페이우스와 최후의 일전에서 승리한 시저(Caesar)에게 한 부하가 폼페이우스와 내통한 자의 명단이 그 안에 들어 있다며 자루 하나를 갖다 바친다. 그러나 시저는 그 자루를 열어보기는커녕 바다에 내다버리라고 소리치며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나더러 나의 우정이 폼페이우스의 그것보다 훨씬 값어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내 심복이 되고도 남을 사람들을 다 적으로 돌리란 말이냐? 피의 복수는 오직 피의 복수를 부를 뿐이다.”

과연 시저가 왜 시저인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설사 그것이 진심이 아니었고 철저히 계산된 전략에서 나온 것이었다 할지라도 이런 포용과 관용의 모습에 상대방은 비로소 마음을 여는 것이다.

구복심불복(口服心不服). 인간사 대부분이 그렇다. 입으로는 복종해도(따라도) 마음으로는 쉬이 복종하지(따르지) 않는다. 잠시의 어려운 형세나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따르는 것뿐이지 진심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은 다 저마다의 생각과 이해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열고 진심을 다해 자신과 함께하도록 한다는 것은 그래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도 상대에게 진심을 다하지도 않고 상상 이상의 관용이나 포용을 베풀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고 한다면 참으로 난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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