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권 인문학강사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ion)!”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소크라테스는 이 말 한마디 때문에 죽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어느 날 신탁을 받았다.

“소크라테스여, 그대는 이 나라에서 가장 현명 하도다.”

평소 자신을 지혜롭다고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소크라테스는 이런 신탁을 받고 의아하게 여겼다. 그렇지만 신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진위를 확인해보기 위해 아테네에서 소위‘ 현자(賢者)’라고 알려진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다니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어보았다.

그 결과 소크라테스는 자신과 그들 사이의 한 가지 커다란 차이점을 발견했고, 바로 그 때문에 신탁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저들은 모르는 게 많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른채 자신들이 온 나라에서 가장 지혜롭다고 여기지만 나는 적어도 내가 무지(無知)하다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다.”

그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만난 현자들에게 예외 없이 오래전부터 신전에 전해오는 말을 건넸다.“ 너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라!”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방문을 받은 아테네의‘ 현자’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무지를 인정하기는커녕 모욕과 불쾌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테네 법정에 소크라테스를 무고와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고발하여 마침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런 반응이다. 아테네의‘ 현자’들뿐이겠는가. 사람이란 대개 누군가 자신의 치부를 들추면 그것을 인정하기는커녕 도리어 모욕감을 느끼며 심지어 마음속으로 보복을 다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다른 경우도 있다.《 한비자》설림편에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관중(管仲)과 습붕(隰朋)이 제나라 환공을 따라 고죽국을 정벌하러 갔다. 봄에 떠나 겨울에 돌아왔는데, 돌아오다 도중에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아무도 길을 아는 이가 없자 관중이 이렇게 말했다.

“늙은 말(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이곳을 다녀봤을 테니) 노마(老馬)의 지혜를 빌릴 만합니다.” 그러고는 노마를 풀어주고 그 뒤를 따랐다. 그랬더니 이내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산중에서 물이 떨어졌는데 주변 어디에도 물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습붕이 이렇게 말했다.

“개미는 (물을 찾아) 겨울에는 따뜻한 산의 남쪽에 살고 여름에는 시원한 산의 북쪽에 사는 법입니다. 개미집의 높이가 한 자나 되는 양지바른 곳을 파보면 그 아래 한 길 깊이에는 반드시 물이 있을 것입니다.” 이에 땅을 파보니 과연 물을 얻을 수 있었다.

지혜로운 사람이란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고 여기기 쉽지만, 관중과 습붕의 경우를 보더라도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단지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때로는 모르는 것이 있음을 솔직히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다.

새로운 사태나 미지의 영역 앞에서 자신의 과거 경험이나 기존의 지식만을 강조한 채 모르는 것을 얼버무리거나 견강부회를 일삼는 것은 결단코 지혜로운 자의 태도가 아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기꺼이 입을 닫고 귀를 열어 배움을 구하고 심지어는 늙은 말이나 개미의 지혜까지도 빌릴 줄 아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지혜로운 사람이다.

지금 어리석은 사람도 자신의 무지를 깨달으면 언제든 지혜로워질 수 있고, 지금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지혜롭다 자만하면 언제든 어리석어질 수 있다.

자신의 무지를 대하는 태도에서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길이 사뭇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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