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강현 (사)한국해비타트전남동부지회 사무국장

언제부턴가 인문학 열풍이 드세다. 여기저기서 인문학 강의가 열리고 00 인문학이란 제명의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갑자기 열풍처럼 다가온 인문학! 그런데 정작 인문학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모른다.

사람 사는 이야기와 감성을 자극하는 그 무엇 같기도 하고 철학과 가치관을 이르는 것 같기도 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다른 생각 같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에겐 낯설기만 한 인문학! 도대체 인문학이 뭘까? 이 단순한 질문에 대해 선뜻 명쾌하게 답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질문은 대단히 유의미하다. 인문학은 인간의 자기존재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비롯됐다. 창조설에 기반한 종교적 믿음은‘ 신학’이란 이름으로 인간의 삶의 작은 영역까지도 제한하고 규제했다. 부족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은 오로지 신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것에 있었다. 그래서 모든 학문은 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데에서 시작되고 종결 되었다. 이는 문학과 음악,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모든 곳에서 절대적 힘을 발휘했다. 그렇게 신학은 공고화되었고 절대적 가치와 질서를 부여하고자 했던 신학의 힘은 세상을 유지해가는 힘의 근원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의 존엄성과 자기결정권은 무시되었다. 종교적 믿음에 도전하는 그 어떠한 행위와 사고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녀사냥이 시작되었고 종교를 내세운 각종 전쟁과 침탈이 계속됐다. 당연히 인간의 삶은 피폐화되고 인간성은 실종되었다. 변화하는 세상의 흐름을 거부한 신학은 갈수록 인간의 욕망 앞에 더렵혀졌고 본래의 숭고한 뜻으로 더 이상 빛나지 않았다.

재난과 전쟁, 기아와 궁핍, 각종 질병으로부터 인간의 삶을 지켜주고 지탱해 줄 거라 믿었던 교회는 오히려 사람들을 증오와 결핍으로 내몰았다.

신학은 신뢰를 잃어갔다. 그렇게 오랜 핍박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인간의 자각은 시작되었다.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것은 신의 뜻만이 아니다는 자각!

결국 왜 똑같은 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인간의 삶은 동일하지 않고 제각각일까?

그렇게 인간자체에 대한 관심과 신의 뜻을 수용하고 실천하는 능동적 인간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인문학은 출발한다. 이러한 자각은 후에 산업혁명과 맞물리면서 인문학이 수많은 갈래로 분화되고 인간의 삶 구석구석을 들여다보는 학문으로 발전했다. 그렇게 분화 발전하던 인문학은 21세기에 이르러 위기를 맞는다. 신학의 반대편에 섰던 인문학은 이제 기계문명의 발달에 따른 인간성 상실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환경 속에서 갈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한 것이다.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와 감성을 옥죄기 시작한 거대한 힘!

그것은 기계문명, 또는 고도화된 산업구조가 탄생시킨 정보화세계인 것으로 보여지지만 실상은 거대 자본주의의 속성에서 비롯되었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오로지 시장 안에서의 가치로만 판단되어지는 사회적 질서는 전 세계를 하나의 범주 안에 끌어다 놓았다. 물질문명의 장족할만한 발전은 인간을 신학으로부터 떨어뜨려놓았는지는 몰라도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과 사유, 감정의 공유, 자긍심과 자부심, 배려와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인간성자체를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사소한 감정의 영역까지도 시장의 논리가 침투하면서 아름답다고 표현되는 인간다움은 어디에도 남아있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죽하면 공익활동시간까지도‘ 거래’할 수 있도록 하자는 발상이 이뤄질까?
지금은 모든 것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화폐의 크기로 그 가치가 규정되어야만 의미 있는 것이 되고만 것이다.

이제 당신의 상상도, 꿈도, 미래도 거래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사회의 이율배반과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진단 없이 여기저기서 인문학 열풍이 분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인문학이 아니다. 나의 감성과 상상, 함께 나누는 은밀한 기억들조차 자본주의 시장 안에서 어떻게 가치를 부여하고 거래할 수 있게 만들 것인가 하는 온갖 스킬들로 가득 찬 그것들이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치장된다.

기업들은 물건을 더 팔고 부를 축적하기 위해 인문학을 이용해 인간의 못된 습성을 파헤치고 작은 인간의 움직임까지도 분석해 판매전략을 세운다.

수많은 축제와 문화행사, 하다못해 쉼을 위해 찾아드는 각종 둘레길에도 어떻게 하면 더많은 사람을 끌어들이고 그리해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하는 생각만이 천착된다.

갑자기 이런 말이 생각난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그에 따라“ 돈이 되어야만 가치 있다고 인정하는 더러운 세상!” 수 천 년의 시간동안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사회적 삶과 개인의 삶을 충돌시키지 않으면서도 조화롭게 이어온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변화무쌍한 오늘날에도 인간이 스스로 위안 받고 서로를 위해 따뜻하게 웃어줄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인문학 위기의 시대에 돈이 되는 인문학을 찾아 허둥댈 것이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땀 냄새 그윽한 엄마의 품 속 같은 정겨운 그것을 찾아가는 여행, 그렇게 인문학의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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