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늬의 풀잎에 드는 햇살

작은 아이가 밥을 잘 안 먹어서 뭐 마땅한 게 없을까 냉장고를 뒤져보니 마른 오징어 채가 눈에 띄었다. 양념해 주는 것도 잘 먹지만 날 걸로 먹는 걸 더 좋아하는 게 생각나서 접시에 조금 덜어주었다. 식탁에 앉은 녀석은 별로 고마와하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박고 책을 읽으면서도 손은 연신 접시로 간다. 비록 아침나절이긴 하나 텍사스 뙤악볕이 예사롭지 않은데 기어코 자청하셔 잔디를 깎던 아버지께서 갈증이 나셨는지 물을 청하며 들어오셨다. “어! 이거 내가 좋아하는 거네” 아버진 오징어채를 보시더니 갈증도 잊어버린듯 손자 옆에 앉아 맛나게 집어드신다. 순간, 음식을 만들던 내 뒷꼭지가 확 달아올랐다. 아들녀석의 식성은 훤히 꿰뚫으면서도 정작 아버지의 입맛은 모르고 있었다니! 물론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지만 마른 오징어채를 좋아하시는 줄은 오늘 아침 처음 알았다. 목사님 말씀이 떠오른다.

“어머님이 편찮으시면 마음은 쓰여도 그러시다 좋아지겠지 하고 곧 잊어버리는데 아들놈이 아프면 내 몸이 아픈 거 보다 더 맘이 아파요. 그 놈이 자지러지게 기침이라도 하면 내 가슴이 더 찢어지는 것 같고, 그 놈이 열이나면 내 몸도 달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도 영육이 병든 우릴 보면 이러한 마음이 아니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땐 목사님이 ‘비유를 참 적절하게도 하시는구나’ 하면서도 예사롭게 넘기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어쩌면 내모습과 똑같은지……!

에미로서의 본능적인 직감이랄까 아이가 아프기도 전에 벌써 그 낌새를 감지하곤 한다. 무심코 잡은 아이 손의 온도가 평소보다 조금만 달라도 아이가 열이 오르겠구나 한다던지, 입술이 까칠하게 일어나고 목소리가 갈라지면 후두부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집어내는 것이랄지, 평소보다 들뜬 소리로 말을 많이 하면 심하게 아플 전초전이란 사실 등 미세한 징후를 난 금세 알아차리곤 하는 것이다. 아이가 아파 누운 동안에도 거의 같이 아프다고 해야할 정도로 초죽음이 된다. 이불자락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잠이 깨고, 쌕쌕 숨소리만 달라도 바늘 끝처럼 신경이 예민해져 입이 쓰고 일이 통 손에 잡히질 않는다.

그렇게 민감한 사람이 정작 아버지께는 둔한 건지 무심한 건지 아버지가 말씀을 하셔야 비로소 알게 된다.
엊그제 일만 해도 그렇다. 남편이 사드린 비타민을 나에게 권하시며 “이 거 참 좋더라. 난 보약을… 먹어도 좋다니까 먹지, 좋은 걸 잘 못느끼는데 어젠 많이 아파서 그랬는지 이 걸 먹었더니 단박 효과가 느껴지더라. 너도 좀 먹어둬라” 하시는 게 아닌가. 아버지가 아프신데도 낌새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는 게 죄송하고 무안해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아프시면 아프시다고 말씀을 하셔야 알지 왜 병을 키우시냐”며 짜증을 부리고 말았다. 그래놓고는 못내 마음에 걸려 늦게서야 사과드린다는 게 결국 남 얘기로 빙빙 둘러 대고 내 마음은 직접 전하지 못했다.

“아버지, 자식은 끝내 자식일 뿐인가 봐요. 글쎄 옆집 해니엄마가 그러는데 자식들에게는 과외비다 뭐다 암만 쪼들려도 어떻게든 해주는데, 부모님에게는 아이들에게 들어가는 돈 십분의 일도 안 되는 단돈 백불도 마음 뿐이지 제대로 못드린다고 한심해 하던데요”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채셨는지 오히려 위로의 말씀을 해주신다.
“원래 사랑은 내리사랑인 법이다. 나 역시도 그랬고, 너도 그럴 것이고, 네 아이들도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누구나 부모가 되면 부모 보담 자식걱정이 더 앞 서는 것이다. 너희들은 태어나고 자라면서 이미 내게 충분한 기쁨과 행복을 주었는데 무얼 더 바라겠느냐. 난 너희들 한테 받을 건 이미 다 받았다”
나는 이 담에 내가 늙어서 기운 없을 때 내 딸년이 지새끼들밖에 모르면 서운해서 심통을 부릴 것 같은데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으신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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