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만한 물가 - 라종렬 광양사랑의교회 목사

풍성한 수확의 계절입니다. '가실일'은 '가을걷이'나 '가을일'의 방언입니다. 가을 걷이가 시작되면 눈꾸녕만썩한 아들(아이들)이나 눈꾸녁 붙은 사람이면 다 쓰인다고 했지요('눈꾸녁' '눈꾸녕'은 '눈(眼)'의방언 표현입니다)

다른 일보다 가장 큰일은 벼를 수확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집에 있는 모든 낫을 다동원해서 숫돌에 낫을 갈기 시작하면 갈아져 나오는 회색빛 숫돌 물이 낫에 묻었습니다. 날이 섰는지 가까이 눈을 대면 코에 가까워져서 나는 쇠와 돌이 부딪혀서 갈려진 그 냄새는 잊을 수 없습니다.

낫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주로 쓰임새에 따라 나뉘기도 하고 날의 방향에 따라 나뉘어지기도 했습니다. 나무를 할 때 쓰이는 날은 보통 조선낫이라 했습니다. 날 위의 등 허리가 꼭 황새목처럼 생겨서 황새목 낫이라고 하는데, 두툼하고 무게도 꽤 무거웠습니다. 큰 나뭇가지들을 찍어 낼려면 날이 튼튼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산에 가는 어른들의 지게 뒤에 엇비슷하게 늘 꽂혀가는 낫입니다. 그런데 보통 풀을 베는 낫은 얇고 가벼웠습니다.

그래서 날이 휘어지지 않도록 등허리 부분이 조금씩 말려있어서 지지대 역할을 했습니다. 오래도록 풀을 베기 위해서는 당연히 들고 일하기에 가벼워야 했고, 풀이 잘 베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날이 날카롭게 곤두서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날이 얇은 것이 더 유리했기 때문이지요. 보통 낫이라 하면 그냥 양날을 쓰는 낫으로 알고 '왜낫'이라 함은 순수하게 풀이나 벼를 베기 위해서 제작된 한쪽방향으로만 쓸 수 있는 낫이었지요. 그래서 왼손잡이(왼낫)와 오른손잡이(온낫)에 따라 낫도 달라졌습니다. 시골에서는 보통은 손잡이 부분이 짧았었는데 어느날엔가부터는 왜낫의 손잡이가 길어졌더군요. 아마도 원래 그런 낫이 있었는데 시골에서는 그냥 짧은 손잡이가 편해서 그렇게 썼던 것 같습니다. 숯 돌에 날을 갈 때도 조선 낫은 양쪽 모두를 갈아야 했고 왜낫은 반드시 한쪽만 갈아야 했습니다.

숫돌에 그냥 간다고 다 잘 드는 것이 아니었지요. 엇갈아 놓은 낫은 처음엔 잘 들다가 이내 잘 베어지지 않게 되지요. 초보자들은 날을 잘못 세워서 엇갈아 날이 넘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 해서 날을 너무 숫돌에 직각으로 대서 날이 무너져 버린것이지요.

아버지가 계신 집은 오랜 노하우로 한번 낫을 갈면 오래도록 잘 베어졌지만 그것을 제대로 몰랐던 제가 갈아 놓은 낫은 쉬이 날이 무디어져서 부득이 여러 개의 낫을 갈아야 했습니다. 지금에야 숫돌이 좋은 철제 받침대로 나온 것들이 많지만 당시에는 그냥 길다랗게만 생겨서 담장이나 계단식 논의 바위 틈에 끼워서 고정해 두고 갈았습니다.

낫 가는 소리랑 갈려진 낫의 색깔이 무척이나 우리들의 호기심을 자아내었고 잘 갈려졌는지 물 묻은 엄지 손으로 날을 만져보는 어른들의 손이 무척이나 신기했었습니다. 잘 갈려진 낫은 손가락으로 문대 보면 '썸벅'하다고 표현하는데 까칠까칠한게 그냥 손이 베어질려고 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썸벅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은 낫은 그냥 맨질맨질하거나 무디게 느껴지면 그 낫은 더 갈아야 합니다.

그렇게 잘 갈려진 낫을 가지고 논으로 가면 어느새 채 씻겨지지 않은 숫돌 물이 회색으로 날과 함께 붙어 있는 것을 보면 뭐든 잘 베어질 것만 같았습니다. 잘 익은 논에 들어가서 채 이슬이 깨지 않은 벼를 대여섯 포기씩 잡고 한꺼번에 채면 한번에 소리도 없이 베어지는 맛이란… 더불어 깔끔하게 잘려나간 밑둥에서 나는 냄새는 종일 일해도 즐겁겠다하는 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이 하루 내내 반복되면 어느새 무뎌진 날과 힘이 빠진 팔이 아파오기도 했었습니다. 그런 낫을 계속 쓰면 결국 팔이 뭉쳐서 그날 오래도록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날이 무디어졌다 싶으면 새참 때나 잠시 하늘을 보고 쉬는 즈음에 금새 다시 날을 갈아서 쓰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오래도록 갈아 쓰는 낫은 저마다의 힘과 쓰임새로 독특하게 날이 닳아지거나 갈려집니다. 자신의 습관이 베인 연장이 되는 것입니다.

갈고 닦는다는 말은 우리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재량을 잘 갈고 닦아 두어야 어느 날 그 일이 필요할 때 소리도 없이 깔끔하게 일을 처리 할 수 있겠지요. 매일 쓰는 낫은 금새 갈기도 쉽고도 잘 베어집니다. 하지만 잘 갈지 않는 낫은 한번 숫돌에 갈기도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릴 뿐 아니라 갈아도 잘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평상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노련하게 사람을 갈고 닦아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고도 싶고 또 늘상 잘 갈려진 낫같은 사람이고도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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