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평통사, 네 번째 평화발자국

“사상 논쟁 떠나 독립운동 공로 제대로 평가 받아야 ”

광양평통사 네 번째 평화발자국 ‘육지발가락 항일운동가 정순화 선생의 혼을 찾아서’가 지난 23일 정순화 선생 생가터(광영동 한독연합의원 옆)일원에서 열렸다.

오종효 ‘광양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상임대표와 회원, 후손인 정준기 씨, 김재무 더불어민주당 광양·곡성·구례지역위원장, 김선근 광양시새마을회 명예회장, 윤영학 광영동장 등이 함께한 이날 평화발자국은 김상기 회원으로부터 정순화 선생의 독립운동 생애를 설명 듣고 선생이 독립운동가로서 제대로 평가 받을 수 있도록 함께 노력키로 했다.

정순화 선생은 1902년 12월 옥곡면 광영리 영수마을(현 광영동)에서 태어나 6·25전쟁 중이던 1951년 12월 9일 사상문제로 경찰에 체포돼 정식재판도 받지 않고 처형됐다.

천석지기 지주출신 정순화 선생은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 한다’는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선생은 서울에 유학하면서 경신고등학교 축구선수로도 활약했다. 광양시 체육사에서도 1922년에 정순화, 이옥동, 안기후 등이 축구를 보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축구는 운동으로서 뿐만 아니라 일제의 눈을 피해 모인 청년·학생들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고, 운동을 하면서 서로의 다른 사상을 이해하고 통일적 독립운동을 위한 만남의 장이기도 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은 당시 광양시 축구선수 대표 명단을 보면 이후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이끄는 중심에서 활동한 김석주와 사회주의 독립운동 중심에 선 정순화가 함께 뛴 기록이 광양시 체육사에 남아 있고 이들이 주도해 만든 광양 독립운동의 산실인 광양청년회가 전국대회를 개최한 기록도 있다. 그러나 특히 1934년 100여명이 체포되는 ‘광양독서회’ 사건으로 광양 축구사는 광복이 될 때까지 긴 암흑기를 맞는다.

선생은 일본 유학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눈을 떠 재산 대부분을 독립운동 하는데 사용했다. 또 일본 유학중에도 광양청년회 준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청년회 창립에 참여하는 열성을 보였다.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기소된 99명 가운데 광양지역에는 5명이 왜경에 검거되는 데 그 중의 한 사람이 선생이다. 이로 인하여 3년여의 옥고를 치루고 이후 이 사건은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이 사상범으로 평가절하 되고 생의 발목까지도 잡는 첫 시발점이기도 한다. 선생은 출감후인 1929년 9월8일 신간회 광양지회 설립에 집행위원으로 참여하고 조직선전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신간회 광양지회를 이끄는 주요인물이 되었다.

조국이 해방되자 광양지역에서도 광양군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선생은 이 위원회 치안부장의 직책으로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광양지역의 치안을 맡아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노력했다. 곧이어 명칭을 광양인민위원회로 개칭되는데 선생은 항일독립투사인 김완근과 함께 이 위원회를 이끄는 실질적인 인물로 주도적 역할을 했다. 당시 미군정은 김석수를 광양군수로 임명했으나 실질적인 행정은 선생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전한다.

김상기 회원은 “정순화 선생의 생애를 추적하다보면 선생은 시대의 아픔을 함께 공유하며 민족의 독립을 꿈꾼 의인이다. 그러나 또 다른 민족의 비극사인 6·25 동란 중 체포 후 정식재판 없이 총살을 당했다. 그리고 이후 역사는 선생의 이름을 언급하면 안 되는 아픈 역사의 침묵을 강요한 시간이 흐른다. 총살형 된 시신은 발가락이 6개라는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어 지인이 찾아 고향에 안장했으나 선생의 후손들은 연좌제의 긴 아픔 속에 흩어져 서울, 보성, 안산 등에 살고 있다는 풍문”이라며 “늦었지만 이제는 선생의 영혼의 눈물을 닦아 주어야 할 시간”이라고 말했다.

오종효 ‘광양평통사’ 상임대표는 “좌ㆍ우익 사상 논쟁을 떠나 독립운동을 한 부분에 대해서는 제대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지역의 독립 운동가를 찾아내는 것 의미 있는 일”이라며 “ 정순화 선생을 독립운동가로 바로세우고, 생가터에 표지석이라도 세울 수 있도록 모두의 관심과 참여”를 당부했다.

정순화 선생의 후손인 정준기 씨는 “집안이 숭배하는 어르신이자 광영의 큰 인물로 알고 있음에도 제대로 조명을 못해왔다”며 “광양평통사의 관심과 노력에 감사드린다. 할아버지의 항일 활동이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계속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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