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광양 역사교과서_ 12

신라말 전제왕권이 약화되고 ‘호족’이라는 지방의 권력자들이 등장하였어. 이 지방의 귀족들이 자신들만의 나라를 세우면서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지. 여기서 후삼국시대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 892년부터 왕건이 고려를 세워 한반도를 통일한 936년 까지를 말해. 이시기에 광양은 견훤이 세운 후백제에 속해있었지. 이시기를 대표하는 광양의 유적으로는 마로산성과 옥룡사가 있어. 마로산성은 위에서도 잠깐소개 했었지? 이성은 삼국시대 백제가 지어서 후삼국시대까지 사용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성을 지은 백제보다 신라가 훨씬 많이 사용했었다고 말했던 거 기억할거야.

▶ 경보 승탑

유물은 그시기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증거지. 삼국시대부터 후삼국시대까지 활발하게 이용되었던 마로산성은 각 시대별 유물들 또한 많이 출토되고 있어. 그중 가장 많은 유물이 출토되는 시기는 통일신라말기와 후삼국시대야. 이시기의 수막새기와(지붕의기왓골끝에사용되었던기와)에는 신라적인요소보다 마로산성만의 독자적이고 지방적인 요소가 강하게나타나. 이것은 광양에도 중앙으로부터 독립된 세력이 호족이 출현했음을 의미하지. 우리는 이호족들이 전남동부의 유력한 호족이었던 박영규 집단일 것 이라고 강하게 추측하고 있어.

박영규는 후백제 견훤의 사위였으나 태조왕건을 도와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던 사람이야. 통일신라시기 광양의주소는 ‘신라국 무주승평군 희양현’으로 순천에 속해 있었다고 한 거 기억하지? 몇몇 학자들은 당시 희양현(광양)이 승평군(순천)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순천지역의 호족이였던 박영규가 광양지역까지 영향력을 펼쳤을 것으로 봐. 순천의 해룡산성에 근거지를 두고 근처의 마로산성까지 장악했다는 거지. 반면, 다른 학자들은 이들의 세력범위를 마로산성만으로 한정하기도 해. 이렇게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른데,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후삼국시대에 마로산성은 박영규 세력의 중요한 근거지였다는 점이지.

▶경보 탑비

이제 경보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게. 옥룡사도위에서 도선국사와 함께 이야기했던 거 기억할거야. 후삼국시대가 막 시작된 시기에 옥룡사에서 도선국사가 잠드셨고, 통진대사 경보가 옥룡사의 맥을 이어가게 되었지. 경보는 경주출신이었고, 어린나이에 경상도 대구팔공산 부인사로 출가하여 광양백계산 옥룡사에서 도선의 제자가 되었어. 25세에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선법을 익히다가 54세 때 전주 임피현(군산)으로 귀국했는데, 후백제의견훤은 그를 전주로 초청해 스승으로 삼았다고 해. 이어서 경보는 광양옥룡사로 근거지를 옮긴 후 견훤의 후원아래 수행을 계속하였지. 경보는 도선에 이어 동리산문 옥룡사파의 중심이 되었어. 이시기 동리산문은 윤다의 태안사파와 경보의 옥룡사파로 양분되었는데, 태안사파는 왕건을 지지하고 옥룡사파는 견훤을 지지하였어. 그러나 후삼국이 통일된 직후, 경보는 왕건의 세력으로 넘어가 왕건에게 극진한 존경을 받았다고 해. 경보는 풍수지리에 정통했던 도선의제자이지만, 그의 행정을 담은 탑비에는 풍수지리와 관련된 내용이 없어. 경보사상의 핵심은 30여년의 중국유학기간동안 전수받은 조동종이었지. 경보에게서 풍수지리사상이 강조될 수 없었음은 조동종을 중시한 그의 사상에서 찾아야 할거야.

지금까지 우리는 후삼국시대의 광양을 대표하는 인물인 박영규와 경보를 살펴보았어. 두인물의 공통점은 처음에는 견훤과의 인연으로 시작해 마지막은 후삼국시대의 승리자인 왕건과의 인연으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점이야. 하지만 동시대에 같은 공간을 살았던 두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점이 없어. 두 사람의 인연을 밝힐 수 있는 새로운 자료가 나오기를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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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룡사탑비전지의 쌍탑쌍비

지난 2002년 11월7일, 옥룡사의탑비전지(비석거리)에서는 불교계인사와 학계문화재 전문가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선각국사도선의 법구봉안식이 열렸어. 옥룡사에서 35년간 수행하다 입적한 도선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굴 6년만에 다시 옥룡사지에 봉안된 것이지. 뿐만 아니라, 1900년대 초반에 파괴되었던 도선과 경보의 승탑과 탑비가 복원되어 옥룡사탑비전지에 가면 쌍탑·쌍비를 볼 수 있어. 이 쌍탑·쌍비의 복원은 1997년 탑비전지발굴조사때 출토된 승탑과 탑비의 조각들을 근거로 해. 도선의 승탑과 탑비는 곡성 태안사의 적인선사조륜청정탑과 탑비를 참조했으며, 경보의 승탑은 곡성태안사의 광자대사탑과 탑비를 참고하였어. 그래서 복원된 쌍탑·쌍비는 원래의 도선과 경보의 것과 ‘같지도 다르지도’ 않을 거야.

여기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승탑과 탑비가 건립되는 일반적인 절차를 살펴보면서 도선과경보의 승탑과 탑비가 가지는 역사적 의의를 살펴볼까? 먼저, 승려가 돌아가시면 신도들이 이를 국왕에게 알려. 국왕은 사신을 보내 조문을 하고 장례를 감독할 관리를 파견하지. 조문절차가 끝나고 나면 뼈만을 추려내기 위한 가매장이나 화장을 하는 1차장을 하고, 3년정도 경과하면 유골이나 사리를 수습하여 본장을 거행한 뒤 그 자리에 승탑을 만들어.

옥룡사탑비전지에서도 도선의 승탑이 있었던 지하에서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가매장후 유골을 수습하여 승탑을 건립하는 본장이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어. 경보의 경우에서도 비문의 내용을 보아 2번에 걸쳐 장이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지. 특별히 경보의 승탑은 국왕정종이 국공(國工)을 시켜 건립하도록 하였다고 해. 보통불교에서 장을치루는 방법으로 화장을 생각하기 쉬운데, 통일신라에서 고려 중기까지의 승려들은 1차적으로 유골과 사리를 추려내고, 본격적으로 장을 거행하는 2차장이 일반적이었어.

옥룡사 탑비전지

탑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도 알아볼까? 신도들은 승탑건립과 제사 등 공식적인 장례가 끝나면 행장(죽은 승려가 평생살아 온 일을 적은글)을 모아 국왕에게 올려 탑비를 세우도록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해. 그러면 국왕은 돌아가신 승려를 왕사나 국사로 임명하고 탑호를 내려 탑비를 세울 수 있도록 허락하지. 도선의 경우, 898년 돌아가신 후 효공왕이 요공선사로 추대하고 ‘중성혜등탑’이란 탑호를 내렸어. 이어 고려현종이 대선사로, 숙종이 왕사로, 인종은 국사로 추대하였지. 경보도 돌아가시자마자 정종이 시호를 통진대사, 탑호를 보운이라 추대되었어. 또한, 국왕은 당대최고의 문장가로 하여금 비문을 찬술하게 하고, 최고의 명필이 글씨를 쓰도록 하고, 최고의 각자(글씨를 새기는 사람)에게 비문을 새기도록 명하지. 도선비는 고려의종때의 집현전 대학사 최유청이 비문을 찬하고, 내시낭중 정서가 비문을 쓰고, 삼중대사처실이 글자를 새겼어. 경보비는 고려 광종때의 한림학사 김정언이 비문을 찬하고, 경보의제자 현하와 계묵이 각각 글씨를 쓰고 비문을 새겼지. 이들 모두 왕명을 받들어 행해진 것이었어.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승탑과 탑비의 건립은 신도들뿐만아니라 국가적으로도 지대한 관심과 지원 속에 이루어졌음을 보여줘. 승탑과 탑비는 모든 승려들이 세울 수 있는 기념물은 아니었지. 승려로서는 최고지위라 할 수 있는 왕사나 국사를 역임한 경우 또는 그러한 지위에 상응하는 예우를 받은 고승들에 한해서 국가적 총력을 기울여서 승탑과 탑비가 건립되었어. 사찰과 폐사지에서 그냥 스쳐 지나치는 승탑과 탑비는 그 시대문화의 총화라고 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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