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희 칼럼 ‘사람이 희망이다’ -김광희 광양보건대학교 교수

초등학교를 다닐 때 집에 배달되던 일일학습지에서 천자문을 배운 일이 있다. 한자를 그림처럼 암기하려니 글자 모양도 까다로울뿐더러 말뜻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래도록 이해하지 못했던 구절 중 하나가‘ 추수동장(秋收冬藏)’이라는 글귀다.‘ 가을 추, 거둘 수, 겨울 동, 감출 장’. 몇 번이고 반복해서 암송해 보아도 가을에 곡식을 추수한다는 사실은 알아듣겠는데, 겨울이 되면‘ 감춘다’는 말은 좀체 납득하기 어려웠다. 감추는 것은 나쁜 일로만 알고 있던 어린 생각에 겨울이면 모두가 무엇을 감춘다고 하니 이게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한자를‘ 갈무리 장’의 뜻과 음으로 익힌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뒤였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그럴 만도 했겠구나 싶다.

농군이 한 해 동안 수고하여 얻은 결실을 갈무리하는 때가 바로 이맘때이듯, 세밑이 되면 모두들 지나간 한 해를 돌아보며 정리하고 갈무리하는 심정에 빠져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는 가을이 되었지만 거둘 게 마땅찮은 이들이 의외로 많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겨울날에도 이들은 감춰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알몸뚱이로 찬바람과 눈보라에 맞서야 한다. 얼마의 시급에 삶을 기대야 하는 사람들이 있고, 자원봉사자가 날라다 주는 연탄 몇 장과 복지수당 얼마로 겨울을 버텨야 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래서일까 도심에 세워 둔 사랑의 온도탑은 올라갈 줄을 모른다. 우리가 사는 가장 현대적인 세상이 이 모양이다. 겨울이 되어도 갈무리할 마땅한 게 없는 사람들.

그들의 빈곤이 스스로의 노력 부족이나 재주의 모자람 때문이라면 할 말이 없을 터이나, 만약 우리가 만든 세상이 그들로부터 가을걷이의 기회를, 갈무리할 대상을 앗아간 것이라면 이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최근 연일 터져 나오는 우리 사회의 얼토당토않은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경험하면서 우리가 겪는 불행과 좌절이 어쩌면 이 모순의 사회가 만들어낸 필연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습은 마치 어릴 때 오목렌즈로 바라본 풍경마냥 언제나 주체로부터 저만치 떨어져 있다. 게다가 때로는 홀쭉하게 때로는 배불뚝이 모습으로 혹은 뒤집혀 왜곡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늘어선다.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취업의 과정이란 언제나 저만큼 멀찍이 떨어져 있는 왜곡된 세상을 경험하는 또 다른‘ 체험 삶의 현장’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만족스러운 학점을 얻었을지라도 그들을 제대로 대접해 주는 일자리를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다. 때로는 몇 차례의 관문을 어렵사리 통과해서 전형의 마지막 단계에 다다르게 되지만, 집안의 배경과 자신의 출신과 이른바 숟가락 색깔 때문에 다시 원점으로 회귀하게 되는 젊은이들을 많이 보게 된다.

실제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서류심사를 거치고, 지필고사를 통과하고, 합숙 전형까지 거친 후, 어렵게 양복에 구두까지 한 벌 갖춰 입고 임원들 앞에 설 수 있었지만 행운의 신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만 관대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풍문은 이미 내정자가 있었다느니, 합격자의 가족 중에 유력한 사람이 있다느니하는 소리를 흘리고 지나갔다. 이 젊은이들을 향해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소리는 역설적이게도 허무하며, 잔인하기까지 한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젊은이들이 사회 초년생으로서 겪어야 하는 좌절과 아픔과 패배감의 원인을 오롯이 이 젊은이들에게만 돌리는 것은 너무 후안무치한 일이라 생각한다. 기업들마다 누군가를 위해 조성한 비자금과 정치 상납금은 이 시대 젊은이들의 눈물 값인지 모른다. 그것은 가을이 되어도 거둘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 겨울이 되어도 갈무리 할 것도, 갈무리해 둔 것도 마땅찮은 이 시대의 초라한 가장들의 고혈(膏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 일그러진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왔을 때, 그때는 제발 심은 대로 거두고, 우리의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수 있는 밝은 세상이 열렸으면 한다. 우리의 이 바람이 간 곳 모르게 흩어져버리는 한줄기 허망한 바람이 아니길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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