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삼포 세대다. 그리고 아버지는 베이비붐 세대다. 나는 아버지를 보면 샌드위치에 끼어있는 숨죽은 양상추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 스스로 아버지를 샌드위치 세대, 혹은 끼인 세대라고 부르곤 한다.

한 때 질리도록 아버지와 기나긴 전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나는 갓 스물이 넘어 성인이라는 명찰을 달고 꽤 어른행세를 했던 때였다. 나는 가부장적이었던 아버지에게 끊임없이 ‘현대적인 아버지상’을 요구했다. 가족과 소통하고 때론 모른 척 져주기도 하고 화도 덜 내고, 엄마에게는 좀 더 너그러운 아버지가 돼 달라고 소리쳤다. 그 결과, 나는 처음으로 사람에 대한 포기를 배웠다. 50년이라는 세월의 관성이 아버지를 놔주질 않았다.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 집 근처 포차에서 아버지와 대하구이를 까먹으며 짧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때 아버지는 자식이 화를 낼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처음 겪어 보는 일이라 화를 내는 것 말고는 도무지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조심스레 고백했다. 술도 마시지 않았건만 나는 정신이 몽롱해졌다.

같은 땅 위에서 자란 줄 알았는데, 아버지와 나는 씨앗을 틔운 밭부터가 달랐던 것이다. 나는 우리 가족이 좀 더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벌였던 일이었건만, 아버지에게는 가장의 권위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위기’의 순간이 되고 말았다.

흔히들 50대를 세대 간의 가교라고 부른다. 지진이 일어나면 땅이 갈라지며 깊은 절벽이 생기듯, 그렇게 50대는 시대변화라는 크나큰 지각변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엎어지듯 다리가 되었다. 한 쪽에서는 그들의 부모인 노인세대가 그들의 등에 비스듬히 기대었고, 반대쪽에서는 막 자란 자식들이 그들의 손을 잡아당겼다.

노인세대에게 확연히 남아있는 전통적 가치도 지켜야하고 시대에 흐름에 따라 ‘변화’해야 하기도 하는 이들. 그 혼란의 증거는 통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부모 생활비 지원’에 대한 견해에서 20대는 ‘부모님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의견이 92.5%로 압도적으로 높았고 ‘모든 자녀가 해결해야 한다’는 응답은 4.7%에 그쳤다. 반면 50대는 ‘부모님 스스로 해결’이 47.4%, ‘모든 자녀 해결’이 37%에 달해 양쪽 다 팽팽한 균형을 이뤘다.

결국 그들은 현 상황에서는 부모를 봉양하다가, 자신이 노인이 되었을 경우에는 자녀에게 지원을 바랄 수 없는 쓸쓸한 위치에 놓이고 말았다.

삼포세대인 나는 주변에서 청년들의 분노 섞인 목소리를 자주 듣는다. ‘노오력’만을 강조하는 세상을 비판하면서 별다른 스펙 없이도 잘 살았던 베이비붐 세대를 원망하기도 한다. 한 때 나도 그랬다. 시대를 잘못타고 났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론은 하나였다. 우리 모두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는 것.

노년층은 빈곤과 고독에 시달리고, 중년층은 끊임없이 돈을 벌면서도 시대흐름에 맞춰 스스로를 변화시켜야 하며, 청년층은 최악의 경제난에서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서글픈 삶을 살아내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는 ‘증오’가 간단한 처방약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세대 간의 증오가 아닌 ‘세대 간의 이해’다. 각자 자고 나란 땅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호강’이라는 단어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20년 전만해도 부모님하면 짝꿍처럼 따라다니는 단어였지만 지금은 스스로를 챙기기도 버거운 시대가 돼 버렸다. 부모님 역시 ‘호강’은 바라지도 않고 그저 자식들이 어려움 없이 평범하게 살기만을 바랄 뿐이다.

삼포 세대와 베이비붐 세대, 우리는 각자 다른 시대에서 태어났지만 지금은 고달픈 한 시대를 함께 견뎌내고 있는 중이다. 때론 누군가를 미워해서라도 팍팍한 세상에 대한 답변을 얻고 싶을지라도, 스스로 가교가 된 아버지 세대를 생각하며 또한 컴컴한 안개 속에 갇힌 자녀 세대를 생각하며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

이해는 화해를 부르고, 화해는 또 다른 화합의 길을 열어줄 것이라 나는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이다.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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