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진 사)백운명차문화원 이사장

▲ 법진 사)백운명차문화원 이사장

차향으로 만나는 인연은 특별하다. 차를 덖는다는 소문을 듣고 불쑥 나를 찾아오는 이들이 많다. 그중 한 사람이 서화가(書畫家) 우보(又甫) 김병규 선생이다. 우보는 어릴 때 뇌수막염을 앓아 청각과 말을 잃었지만 대신 영혼으로 소리를 듣는다.

어느날 그가 말했다. "먹물을 벽에 던지면 흐르는 먹물 사이로 대금소리가 들려요." 우보의 서실은 순천에 있었고 내 차실은 광양에 있었다. 때로는 새벽 기도 시간에 찾아 온 우보는 "스님의 목탁소리 듣고 싶어 왔어요." 우리는 서로 오가며 창작과 차맛에 관해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내가 핸드폰 문자서비스를 배운 이유도 우보와의 소통을 위해서였다.

"스님, 지금 뭐하세요?" "예, 마당에서 김매고 있어요." "선생님은 뭐하세요?" "예, 글씨 쓰고 있어요." 이렇게 문자를 주고받다가 직접 만나는 날이면 차를 마시며 밤을 지샜다.

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이야기로 밤을 밝혔다. 그때 새끼손가락 걸며 추사가 되고 초의가 되자고 했던 우리의 약속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우보에게는 지리산 뱀사골 달궁에서 득음을 위해 절차탁마(切磋琢磨)하던 절친이 있었다. 지금은 판소리계에 꽤나 알려진 배일동 명창이다. 배 명창이 가끔 달궁에서 내려오는 날이면 우리 셋의 자리가 한층 고조되었다.

그해 늦가을 불기운 없는 차실에서 우보는 나에게 집필묵을 준비해 달라고 하더니 명창에게 소리를 들려 달라고 했다. 명창의 소리에 따라 신이 난 우보는 장단을 맞추고, 붓을 든 손놀림은 예사롭지 않다. 나도 덩달아 어깨를 들썩이며 추임새를 넣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북돋았다. 아련한 기억이다. 그때 우보가 쓴 글씨 '정관(靜觀)'은 지금도 차실에 서각으로 걸려 있다.

대학교수인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서예에 전념하기를 바랐지만, 정작 아들은 서화를 원했다. 서른을 넘긴 우보는 그 끼를 억누르면서도 늘 아버지 품을 벗어나고 싶어 했다.
나는 우보에게 무조건 서울로 가서 그림에 몰두해보라고 권했다. 결국 우보는 상경했다.

그동안 나는 병을 얻어 두 번의 큰 수술과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적처럼 일어났고, 두 사람은 늦장가를 가서 가정을 꾸렸다.
이후 우보는 가끔 만났지만 해외공연으로 바쁜 배 명창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 이십 년만에 배일동 선생을 만났다. 당시 우리 셋은 모두 가난했었다.

그나마 작은 절 주지인 스님이 제일 풍족한 축에 속했다고, 너스레를 떨며 웃는 모습이 예전 그대로였다. 나의 처소는 말이 집이지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신도들이 불전에 공양 올린 탓에 밥을 굶지는 않았지만, 전기요금 수개월치 밀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나마 찻자리가 있어 우리는 격조를 잃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우보와 새끼손가락 걸며 약속한 대로 차를 덖고 틈틈이 그림을 그리며 초의를 따르고 있다. 우보는 서울예술대학교 예술창작기초학부에서 후학을 지도한다.

배 명창은 얼마 전에 그의 삶과 판소리를 인문학적 소양으로 풀어낸 <독공(獨功)>이란 책을 펴냈다. 그 가난했지만 뜨거웠던 시절 이후 우리 셋은 아직 한자리에 앉아 차 한잔 나누지 못했다. 며칠 전에 두 사람이 모처럼 만난 자리에서 내게 전화를 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만나자고 약속했다. 우리가 만난 자리에는 언제나 차가 있었고 소리와 글씨가 함께했다.

말 그대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다. 그 속에 감춰진 색향미(色香味)를 찾아내는 작업이 차를 덖는 일이라면 성촉법(聲觸法)은 차를 마시는 행위에 있다.

차를 마시는 행위는 수행이며 반야지혜의 길에 들어서는 문이기도 하다. 오래전 기억 하나. 어느날인가 우보는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을 불러 달라고 했다. 곧 서울에서 셋이 만나면 그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지만 차 한 잔의 인연은 이토록 오랫동안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흘러 온 세월만큼 우리들의 우정도 차향처럼 깊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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