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알도에서 남도대교까지 ‘뚜벅뚜벅 37.7km’

<Intro>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 온종일 베개 위에 앉아 지루한 시간과 싸우던 강아지 ‘고미’가 오줌을 찔찔 흘리며 나를 반긴다. 그 벅찬 마음 어찌 할 줄 몰라 침대 밑, 부엌, 화장실을 쏘다니며 빙빙돈다. 11평 남짓한 작은방, 한 바퀴 도는 데 고작 3초밖에 걸리지 않는 세상에서 제일 작은 운동장.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하고 지치고, 너는 왜 이렇게 심심하고 외로운 걸까? 프로펠러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고미의 꼬리. 그래, 하루쯤은 헐렁헐렁하게 살아보자. 그래봤자 무슨 큰일이라도 나겠어?


1.배알도 해수욕장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곳

: 바다 건너편 망덕산을 향해 절을 하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 배알도’. 광양시민들의 쉼터인 배알도 해수욕장은 보이는 것과 달리 유속이 빠르고 구간의 깊이가 급변하기 때문에 물놀이는 절대 금지다.

진안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 550리 물길이 바다와 만나는 곳, 그곳이 우리의 시작이었다. 먼길을 굽이쳐 흘러온 섬진의 강물은 끝없는 바다를 향해 마지막 걸음을 내딛었다. 어디로 가는 건지 알 순 없지만, 섬진의 강물은 더 많은 물고기를 품을 것이고 때론 거센 풍랑을 만나 더 많은 눈물을 거꾸로 흘릴 것이다. 그렇게 강에서 바다로, 강류에서 해류로… 스스로를 키워내면서.

2.망덕포구
-잠자는 배들, 희미한 만선의 추억

: 망덕포구는 예부터 전어와 조개들의 천국이었다. 어부들이 만선을 기원하며 부른‘ 전어잡이 노래’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될 만큼 가치가 높다. 매년 9월경에는 포구 일원에서 전어축제가 열린다. 전어내장으로 담은 젓갈‘ 밤젓’은 아는 사람만 아는 젓갈계의 최고봉.

덜그럭 덜그럭, ‘고미’가 밧줄에 줄줄이 매달린 소라 껍데기들을 콧등으로 건드려본다. 강물에서도 ‘내 집 마련’은 하늘의 별따기, 집없이 떠돌던 가난한 쭈꾸미는 어디선가 떨어진 소라껍데기를 보고 먹물방울을 뚝뚝 흘리며 기뻐했으리라. 드디어 나도 집이 생겼어, 라고 자랑하기도 전에 밧줄은 하늘로 솟구치고… 아 너의 슬픔은 곧 어부의 기쁨이 되리.

3.정병욱 가옥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그리고 친구

: 윤동주의 유고시집이 온전히 보존돼 있던 곳. 1941년, 윤동주는 일제의 탄압에 의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지 못하고 친구 정병욱에게 원고를 맡긴다. 정병욱 어머니는 시집을 마룻바닥에 고이 숨겨뒀다가 광복 이후 세상에 꺼내놓는다.

창 너머로 윤동주의 원고가 숨겨져 있던 마룻바닥을 훔쳐보았다. 굳게 닫힌 미닫이 문. 그 앞에 서서 대학시절 함께 글을 썼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 작품을 목숨 걸고 지켜줄 수 있겠어?” 친구가 말했다. “지켜줄게…” 감동하려던 찰나, “근데 문제는 목숨 걸고 지킬 만큼 퀄리티 있는 작품을 네가 쓰냐는 거지. 만약 글이 엉망이면 불쏘시개로 쓸 거야” 나는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4.섬진강 갈대밭길
-내가 뛰면 강아지도 뛴다

: 진월 오사리 고수부지에는 1만 5천 평 규모의 꽃양귀비가 식재돼 있다. 진월면에서 관리하는 대규모 꽃양귀비 밭은 매년 5월이면 붉게 만개한다.

황금색 갈대밭으로 채색된 섬진강 하류는 움직이길 싫어하는 나조차도 들썩이게 만든다. 개 줄을 움켜쥐고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의 마음처럼, 겨울바람을 헤치고 달리기 시작한다. 고라니 똥냄새를 맡던 ‘고미’는 내가 뛰자 자기도 질세라 힘껏 달리기 시작한다. 겨우 4개월 된 똥강아지 ‘고미’는 나보다 훨씬 빠르다. 고 작은 것이.

5.오사리 돈탁마을
-조개껍질과 소나무의 오래된 기억

:오사리 돈탁마을 북쪽에는 동쪽으로 뻗은 구릉이 있는데, 이 구릉을 가로지르는 농로 길에 선사시대 패총이 형성돼 있다. 빗살무늬토기편과 사슴뼈, 굴껍질 등이 출토됐다. 마을 앞 제방에 우거진 160여그루의 소나무 숲은 그 경관이 빼어나 중종 23년(1528년) 광양 초대 현감 박세후가 광양 팔경의 하나로 지정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굶주린 배를 쥐고 조개를 구워먹은 자리. 그리고 250살이 넘은 소나무어르신이 집집마다 굽어 살피는 곳. 돈탁마을에 서 있으면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굵직한 소나무 옆에 놓인 벤치에 앉아 늦은 점심을 먹는다. 나는 2천 원짜리 김밥 한 줄. 고미는 5천 원짜리 오리고기 육포. 역시 개팔자가 상팔자.

6.하동, 그리고 섬진
-새들도 흔적을 남기고 가는 곳

: 섬진교 아래 하동 섬진강변에는 조선 영조 21년(1745년) 당시 강의 범람과 모래바람을 막을 목적으로 심었던 소나무 800여그루가 한 폭의 그림처럼 남아있다. 옛날 장군들이 입었던 철갑처럼 단단한 껍질을 두른 노송은 천연기념물 제445호로 지정됐다.

섬진교를 건너니 어느새 경상남도 하동. 발이 푹푹 빠지는 하얀 모래가 끝없이 펼쳐진 곳. 멀리서 손님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동네 똥개 한 마리가 마중을 나왔다. 겨울철새들은 옹기종기 모여 다음 행선지를 이야기하고… 멈춰있는 듯, 흐르는 듯 꾸물꾸물 거리는 강의 물결. 지치지 말고 꿋꿋이 가길, 바다에 닿을 때까지…

7. 매화마을
- 꽃망울 터지기 직전,
새어나오는 꽃내음
: 남도의 가장 황홀한 꽃 축제라 불리는 ‘광양매화축제’. 섬진마을 일원에서 펼쳐지는 매화축제는 오는 3월 11부터 19일까지 9일간 진행된다. 홍쌍리 여사가 일군 수만 그루의 매화나무가 봄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개화를 준비하고 있다.

매화꽃 향기 한 잔이면 봄의 취기가 물큰 올라오니, 아 그 황홀함 잊지 못해 해마다 3월이면 전국 각지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이 몰려온다지. 지천에 매화꽃잎이 봄눈처럼 휘날리는 그 광경을 네가 꼭 봐야하는데. 고미에게 곧 다가올 매화축제의 풍경을 손가락으로 그려주었다. 고미는 꿀렁꿀렁 되새김질을 하더니, 돈탁마을에서 먹은 고급육포를 몽땅 토했다. 그리고 다시 말끔히 먹었다.

8.남도대교
-세 도시를 품은 섬진강

: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탑리와 전라남도 구례군 간전면 운천리를 잇는 다리. 영·호남 교류활성화를 위해 2013년 7월 개통했다. 다리가 생기기 전, 주민들은 줄배를 이용해 섬진강을 건너곤 했다.

오후 5시 48분, 우리는 마침내 광양을 벗어나 남도대교에 이르렀다. 구례와 하동을 잇는 태극문양 색깔의 아치. 세 도시를 품은 섬진강은 어느새 한층 더 넓어져 있었다. 주머니를 뒤적여 남은 간식을 고미에게 건넸다. ‘수고했어.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프로펠러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고미의 꼬리. 그래, 하루쯤은 헐렁헐렁하게 살아보는 것도 괜찮네. 그 말에 동의하듯 고미가 멍-하고 짖었다. 그렇게 우리의 소박한 여행은 끝이 났다.


From. 고미
매일 피곤에 찌들어있던 주인이 오늘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아침부터 나를 끌고 나갔다. 난 공원에 가는 줄 알고 폴짝폴짝 뛰었는데, 그 길이 황천길이 될 줄은…. 달리고 달려도 끝이 없는 길과 마셔도 마셔도 줄지 않는 영원한 물그릇. 하동에서는 난생 처음 여자 개를 만났다. 털 색깔이 너무 고와서 거기에 둥지를 트려 했건만 주인이 우리를 갈라놓았다. 밉다. 오늘 밤 반드시 이불에 오줌을 싸고 말리라. 우리는 남도대교에 도착해서야 겨우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원망의 의미로 주인을 향해 멍- 하고 짖었다. 다신 너를 따라가나 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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