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국어국문학과’ 졸업... 오는 4월에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로 트래킹 계획

생명 연장된 만큼 삶의 질에 보다 신경 써야... 내 삶 통해 ‘노인 행복’ 보여주고파
농협중앙회 광양ㆍ여수ㆍ순천 시지부장 역임... 현재는 ‘농사’와 ‘글쓰기’에 푹 빠져

땅’에서 일구는 삶; 괭이를 손에 쥐다

▲ ‘70세 농사꾼’ 이종태 씨

올해 70세의 이종태 씨는 50여 작물을 기르는 농사꾼이다. 작업기나 경운기 등을 이용하지 않고 오로지 삽과 괭이 등의 재래식 농기구를 이용해 농사를 짓고 있다. 여기에는 그만의 농사철학과 사유의 정신이 배여 있다. 농협중앙회 광양ㆍ여수ㆍ순천 시지부장을 역임했던 그는, 퇴직 후 750여 평의 논에서 농사를 시작했다.

이종태 씨는 “농협에서 근무한지 37년 동안 어느 책에선가 읽었던 ‘흙이 가르쳐 주는 것이 책보다 더 넓고 깊다’는 글귀를 항상 가슴에 담고 살았다”며 “퇴직 후 농협에서 근무하며 주인으로 모셔온 농민들의 처지와 농업의 현실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어 농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평소 호기심이 많고 낭만적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그는 한 가지의 작물이 들려주고 보여주는 이야기에 만족 할 수 없어 50여 가지의 각기 다른 작물들을 심었다. 다양한 작물을 심다보니 일괄적으로 흙을 파는 작업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일일이 작물의 특성에 맞게 곡갱이와 삽으로 땅을 팠다. 많은 이들은 고된 농사를 짓는 것도 모자라 왜 이런 고달픈 과정을 겪는지 모르겠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그는 이런 농사의 과정에서 ‘남들과는 다른 경험’과 ‘사유의 깊이’를 얻었다고 했다.

‘배움’에서 일구는 삶; ‘늦깎이’ 국문학도

이 씨의 조부는 동학에 관여해 모진 고생을 겪은 후, 배움이 훗날 고초를 빚어 낼 수 있다는 뜻을 선친에게 남기고 떠났다. 때문에 공부를 좋아했던 이 씨에게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중학교 까지만 다니고 농사를 지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가까스로 고등학교까지 졸업했고,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적 갈망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사랑과 행복’, ‘철학’, ‘종교’, ‘죽음과 사유’, ‘문학과 역사’ 등 노트를 준비하고 하루 2시간 이상의 신문 공부와 잡독을 즐겼다. 감명을 주는 글들을 기록하고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음미했다. 노트의 권수가 늘어날수록 배움에 대한 갈망도 더 늘어만 갔다.

이 씨는 “하루는 농작물을 돌보고 있는데 인근 밭에서 허리가 땅에 닿을 듯한 노부부가 일하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됐다. 순간 더 늦기 전에 그들의 삶을 예찬하는 시 한수 지어 바치고 싶다는 생각이 물밀 듯 밀려들었다”며 “경로우대의 나이에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지만 ‘발분망식’이라는 공자님의 말씀처럼 끼니를 잊을 정도로 배움은 내게 큰 즐거움을 갖게 했다”고 말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학점관리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체력관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아침에 일어나면 50분씩 스트레칭을 하고 서산에 오르곤 하면서 공부를 이어갔다.

‘어려움’에서 일구는 삶; 아픔에 다가서는 능력

재작년 1월 이 씨의 아내는 갑작스레 ‘뇌경색’으로 쓰러졌다. 아내가 병을 얻자 근심으로 체중이 6kg이나 급격하게 줄었고 보는 사람들마다 그를 측은하게 여겼다. 슬픔과 아픔 안에 갇혀 지내는 자신을 발견하고 아내에게 다시 한 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씨는 “책상 앞에 ‘참된 즐거움은 삶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나 인식의 확장에 있다’라는 글귀를 써놓고 수없이 되뇌었다”며 “아픔에 다가갈 수 있는 능력, 고통을 받아들이는 성숙된 자세를 갖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매일 거울 앞에 10분 이상 서서 억지로 ‘박장대소’를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슬픔 앞에서도 남들을 축복하고 정직한 마음을 갖기로 다시 한 번 용기 냈고, 공부에 대한 열정도 포기하지 않고 이어나갔다. 아내는 점차 건강을 회복해 나갔고, 지난 2월 계획했던 대로 학업을 마치고 그는 학사모를 머리에 썼다. 입학할 당시 동부육군에서 총 12명의 신입생이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는데 4년 만에 졸업한 사람은 이 씨, 한 사람뿐이었다.

‘글’에서 일구는 삶; 읽고 쓰고 ‘행복’을 나눠

자칭 농사꾼이라고 칭하지만 최근 중앙지에 ‘존엄한 죽음의 서’, ‘민중’이라는 제목의 두 편의 글이 연속으로 실릴 정도로 그의 글 솜씨는 뛰어났다. 그에게 글을 쓰는 특별한 요령이 있는지를 묻자 “농사를 지으며 아침의 맑은 이슬로 씻기고 고운 저녁놀로 닦은 내 영혼은 꿈을 찾는 더듬이와 촉수가 돼 지천의 들꽃 들 이야기를 밀봉 한다”며 “설산에 흘러내린 맑은 물은 호수에 고여 산 그림자를 품는다. 정직하고 착한 심성을 기르고 독서도 하고 명상도 하며 사물을 보는 나만의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는 오는 4월 ‘칠순 버킷리스트’로 정해둔 히말라야의 안나프르나 트래킹을 떠난다. 노년이 돼 주위를 둘러보니 장수를 희망하지만 연장된 수명을 의미 있고 행복하게 보내려는 노력의 구체성이 부족한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

노년의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흥미’와 ‘무료’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는 그는, ‘노인행복전도사’가 앞으로의 꿈이라고 밝히며 “가슴 뛰는 내 노년의 삶을 주변에 알리고 나누고 함께 할 생각이다. 노인들의 행복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인식하며 향유 할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또 ‘죽음의 서’에 이어 평생에 걸친 퇴고 작업을 통해 ‘사랑의 서’ ‘영혼의 서’ 등 시리즈를 써나갈 계획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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