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종렬 광양사랑의교회 목사

라종렬 광양사랑의교회 목사

세월호에서 희생당한 단원고 2학년 5반 이창현군의 엄마 최순화 집사가 어느 교회에서 한 기도문 중에 한 부분입니다. “창조주이시며 전능자라고 불리우는 당신께 기도드리는 거 쉽지 않습니다. 3년 전 우리 아이들의 살려달라는 마지막 기도를 외면했었으니까요. 당신께 등 돌리고 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든 당신이 함께 계시더군요.

더 이상 울 힘 조차 없어 그저 멍하니 앉아 바다만 바라보던 팽목항에도,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서 하늘을 보며 잠을 청해야 했던 국회에도, 내리 쬐는 땡볕을 피할 그늘 하나 찾기 어려웠던 광화문에도, 하수구냄새에 시달려야 했던 청운동 사무소에도 침몰지점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동거차도에도, 그리고 병든 몸을 이끌고 세월호가 누워 있는 목포신항에도, 당신은 계셨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몰랐던 분들이 눈물가득 고인 눈으로 다가와서 안아주시며 같이 울어주시는 따뜻함에서 당신을 함께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하략).”

공교롭게도 올해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활절이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날로부터 딱 3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부활절 전 40여일부터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장사된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면서 사실과 진실 그리고 의미를 되새기며 보냅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2천년 전에 일어난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해년마다 반복해서 기억하고 기념하고 그 의미들을 되새기는 기독교인들 중에서 왜 일부 극우적 성향을 가진 이들이 불과 3년 전의 세월호에 대해서 그토록 공감하지도 못하고 막말과 폄하와 왜곡하는 이야기들에 부화뇌동하며 유가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이들이 있는지 마음이 아픕니다.

공감 능력에 대한 부족이 원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믿음과 삶, 신앙과 현실에 대해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마약처럼 현실을 부정하고 피안의 세계를 동정하거나 절대자의 뜻에 모든 것이 있다는 자조와 운명론적인 신앙이 지금 현실에 있는 모든 관계와 사실과 사건들을 외면하고 도피하게 하는 것들이 결국 주위에 일어나는 아픔과 고통에 대해 공감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책을 보면서도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사람을 보면서도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자꾸만 이면에 있는 의미만을 추구하고, 의도만을 찾으려하고 보지 못하는 것들만 강조하다보니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지도 공감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을 맞닥뜨리면 극단적인 행동을 하면서 거부하고 거절하며 매도해 버리기까지 합니다. 비단 종교의 가르침들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건만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모습들은 더불어 함께보다는 자신의 기득권을 더 불려서 혼자 잘먹고 잘사는 것이 성공적인 삶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조장하고 부추기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함께”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일하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먹는 것도 노는 것도 함께하길 즐겨합니다. 특히나 책읽는 일에 대해서도 함께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함께 해야 제대로 끝까지 완주하는 읽기가 가능하고, 나의 부족함을 함께 읽는 이들이 채워주며, 함께 나눌 때 서로 섬겨주면서 풍성해지고, 더불어 함께 자라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채운 것으로 또 서로 섬길 수 있고 나눌 수 있을 때에 기쁨이든 배움이든 모든 것들이 배가되어 함께 번영(공영)해 갈 수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창조주는 함께 사람을 만들고 함께 사람을 세워가고 함께 일하셨는데 그것을 거부한 인간은 독존하려고 몸부림칠수록 악으로 치닫게 됩니다. 결국 독처하며 고립된 인간을 건지러 오신 예수님의 이름도 함께 함이라는 의미를 가졌고(임마누엘), 그렇게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으며, 함께 하는 무리들을 세워서(교회) 고립된 인간들을 함게 하는 자리로 인도하길 원하셨고, 그 일을 이루는 무리들을 향하여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해 주시겠다 약속해 주셨고, 지금도 함께 일하신다고 하십니다.

그것을 믿고 의뢰하고 살아가는 종교가 기독교이며 많은 종교들이 유사한 가르침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누리는 이들이 이것을 왜곡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순간 인간이길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립되어 사는 게 사는것이 아닌 삶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더불어 함께 채우고(공감), 함께 존재하고(공존), 함께 자라가는 일(공영)들이 건강하게 정착되어 가는 사회와 공동체와 정치가 성숙한 사회이며, 성숙한 공동체이고 성숙한 정치라고 믿습니다.

독처하여 겪는 고독과 고난과 고통을 맛본이라야 공감, 공존, 공영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아픈 이웃과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영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삶이 아프거든, 아픈 이들이 주위에 있거든 결국 함께 살라고 붙여주고 섬겨주라고 존재하는 것임을 믿고 손을 내밀고 어깨동무하며 그렇게 함께 이겨가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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