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읍 금성 이발관을 44년째 지키고 있는 김정구 이발사

▲ 김정구 이발사

삐그덕 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간다. 바리캉 기계소리에 흠짓 놀란다. 오래된 간판, 노랗게 칠해진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선 ‘금성 이발관’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낡은 이발용 의자 팔 받침과 손때 묻은 가위들은 지나간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금성 이발관의 주인장인 이발사 김정구(72) 선생을 만나 그 시절로 한번 돌아가 보자.

이발관에 오려거든
이른 아침부터 오시게

오전 7시 30분, 금성이발관이 문을 열었다. 광양읍 천주교광양교회 앞 ‘금성이발관’이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 후 어린 나이에 이발을 시작했다. 오래된 이발용 의자 두 개와 작은 난로, 플라스틱 세면 개수대가 이발관의 역사를 보여준다.

김정구 이발사는 광양읍 옥룡면 우곡리에서 태어났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우곡리에서 목성리로 거주지를 옮겼다. 어릴 적 아버지를 여의고 사형제와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집안 형편상 공부를 더 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먹고살려면 기술을 배우는게 가장 좋았다. 김정구 이발사는 “그때는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서 말도 못 했다”며 “무작정 이발관으로 찾아들어가 일부터 했다”고 말했다. 돈을 벌기로 결심했다. 어린 나이에 무작정 이발관으로 들어갔다. 이발관 청소부터 이발사 보조까지 다 했다. 손에 쥐어진 돈은 몇 푼 안 됐지만 행복했다. 스스로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 그 후 김 이발사는 서울로 상경한다. 이발사로 멋지게 성공하고 싶었다.

44년간 잡아온 가위
그 속에 담겨있는 역사

18살 때 서울로 갔다. 흑석동에 작은 방을 얻었다. 시장에서 먹는 밥은 집밥처럼 정겨웠다. 김 이발사는 “다행히 외롭거나, 쓸쓸하거나 힘들지는 않았다”며 “이발관 일이 많아 집에 오면 자느라 바쁜 것도 있지만 성공을 해야겠다는 다짐이 가장 컸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계속 서울에서 지내고 싶었지만, 광양에 계시던 김 이발사의 어머니가 덜컥 이발관을 인수받았다. 김 이발사는 그 길로 광양에서 ‘금성 이발관’의 주인이 됐다.

금성 이발관을 지금까지 지켜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바로 늘 찾아주는 ‘손님’들이었다. 그는 “아침 7시 30분에 문을 여는데도 손님이 먼저 와있는 경우가 있다”며 “주로 노인네들이 오니까 아침 일찍 와야 돼. 문을 닫은 날에는 언제 나오냐고 연락을 해대니 어쩌겠어”라고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손님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사람. ‘금성 이발관’을 찾는 이들 모두는 40대부터 꾸준히 오던 친구들이다.

김 이발사는 “그래도 지금 생각해보면 기술을 배우길 참 잘했다”며 “힘든 날도 많았지만, 4남매 대학까지 다 보내고 이 나이 먹어서도 일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좋아”라고 말했다.

다시 태어나면 실컷 공부를 하고 싶다는 김 이발사. 그가 우직하게 걸어온 이발사 인생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바로 ‘지금’이라고 한다. 그는 “오늘은 지나가면 또 오지 않는 것 아니냐”며 “책으로 하는 공부는 못했어도 인생 공부는 많이 하고 있으니 그걸로 됐다”고 말했다. 김 이발사의 마지막 한 마디에서 그가 말하는 빛나는 ‘지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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