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마 주공2차 주공세탁소의 20년의 기록

상처의 기억을 지우는 세탁소가 있다면 어떨까. 햇살 좋은 날, 온갖 걱정들을 다 함께 모아 깨끗이 빤다. 탈수까지 마무리 된 빨래를 ‘탈탈’ 털어 볕에 뽀송뽀송하게 말린다. 찌들었던 걱정이 싹 사라진 자리에는 따스함으로 가득 찬다.

중마 주공2차 아파트 상가에 위치한 주공세탁소 오후 2시의 풍경은 포근했다. 가게 외관이 어찌나 정겨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격파괴’, ‘깨끗한 크리닝’, ‘양복양장’, ‘조끼’라고 적힌 외관이 80~90년대 드라마세트장을 떠올리게 한다.

좌절이 또 다른 기회를 만들다

▲ 주공세탁소 주인 박정규 씨

세탁소 문 밖으로 주공세탁소 주인 박정규(54) 씨가 고개를 빼꼼 내밀며 단골을 기다리고 있다. 박 씨의 세탁 경력은 어느덧 25년이 흘렀다. 스팀을 뿜어내며 주름 하나 없이 다려내는 옷들과는 다르게 박 씨의 인생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의 어릴 적 꿈은 ‘초등 교사’였다. 광양고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 5남 1녀 중 넷 째였고, 형님들도 있었지만 공부를 하겠다는 말이 도무지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서울에서 양복점을 하고 있는 형님 옆으로 가 아동복을 만드는 일을 했다. 일은 재미있었다. 돈 버는 재미도 쏠쏠했다. 하지만 인생에는 늘 곡선이 존재한다. 메이커 옷이 나왔다. 양복점이 어려워졌다. ‘하이팝’, ‘언더우더’ 등 새로운 옷이 속속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양복점과 아동복은 문을 닫았다. 박 씨는 좌절했다.

고향에서 또 다른 ‘삶’을 시작하다

돌고 돌아 결국은 고향이었다. 고향냄새는 늘 그렇듯 여전했다. 눈물이 났다. 고개를 떨구었다. 고향의 힘은 세다. 박 씨를 일어서게 했다. 그는 “할 줄 아는 것이 옷을 만드는 일이여서 세탁소를 시작하게 됐다”며 “20여 년 전만 해도 세탁소를 찾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신명나게 일만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때만 해도 세탁소 한 달 매출은 400만원에서 500만원을 웃돌았다. 밤 12시까지 일을 해도 힘들지가 않았다. 그는 그때가 인생의 ‘황금기’라고 표현한다.

박 씨는 “그때 참 좋았지. 사랑하는 아내도 만나고, 함께 세탁소 하면서 고생을 시키긴 했지만 그래도 참 행복했었다”고 말하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파트 상가에 있다 보니 세탁소를 찾는 이들은 거의가 상가 주민들이다. 빨래를 들고 오면서 함께 가지고 오는 것은 바로 ‘정’이다. 새참, 커피 등을 가져다주며 박 씨를 그렇게 챙긴다.

세탁소를 운영하며 가장 기쁠 때는 단연 ‘세탁을 찾아갈 때’ 란다. 그는 “손님들이 세탁을 찾아가면서 돈을 더 받아야지~라고 하는 말이 가장 기분이 좋다”며 “옷 수선이 너무 잘 됐네~같은 칭찬도 천 냥처럼 느껴진다”고 설명했다.

주공 세탁소 단골 중에는 박 씨의 꿈이었던 ‘초등 교사’ 한 분이 있다. 인근 초등학교에 근무하다 여수로 발령을 받았다. 박 씨는 그가 올 때마다 초등 교사에 대해 많은 질문을 퍼부었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 아닌 미련이었다. 그 단골손님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초등 교사를 경험했다. 그러던 단골손님이 여수로 발령이 났다고 했을 때 서운함이 폭풍처럼 밀려왔다.

박 씨는 “단골이 멀리 간다고 하면 서운한 건 당연하다”며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여수에서 여기까지 세탁물을 가지고 오더라”고 말했다.

여수에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의 거리가 가까워서가 아니었을까. 주공 세탁소를 지키고 있는 박 씨가 주는 ‘정’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스팀다리미에 스위치가 들어왔다. 하얀 김을 내며 누군가의 주름진 옷을 쫙쫙 펴주는 일을 하는 박 씨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단골손님 옷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이제 좀 순탄하게 좋은 길만 가면 좋겠어” 그의 바람이 주름진 옷 위로 함께 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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