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룡 (황안과 원장)

인류역사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욥과 같이 극과 극을 경험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고대사회의 동방에서 가장 큰 자라고 불리던 사람인데 천국의 하나님도 그의 온전한 인격과 신앙심을 인정하여 자랑할 정도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하나님도 궁금하셨나봅니다. 어느 날 그를 시기한 사탄의 권고를 따라 하나님이 허락한 재앙이 연이어 터져 나옵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부자이던 그의 전 재산이 다 날아가고 열 명의 모든 자녀들을 다 잃고서도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으니 알몸으로 돌아갈 것이며 주신이도 주님이시고 거두신이도 주님이시라>며 오히려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피부병이 너무 심하여 기왓장으로 몸을 긁고 있던 그에게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아내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우직하게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재앙도 받지 않겠느냐>며 반문할 정도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그의 재산은 갑절로 늘어나고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3명의 딸과 7명의 아들을 얻어 140세를 살며 장수하였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다가온 고통도 주님이 허락한 것이며 고통 후에는 더 큰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욥과는 달리 우리는 고통 그 자체를 크게 확대하여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이 마치 자기한테만 찾아오는 것으로 착각하여 온갖 불평불만을 터뜨립니다. 그렇지만 우리 몸은 중요 장기일수록 고통을 더 잘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고난이 많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이 더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고통과 쾌락에 대한 이론 중에 정동의 대조 즉 대립과정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쾌락(기쁨)과 고통은 서로 짝을 이루면서 우리 인간의 욕망을 관리한다는 이론이 그것입니다. 어떤 자극이 기분 좋은 보상으로 이어지면 자꾸 반복하려 하지만 처벌로 이어지면 그 자극을 피하려 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주어지는 자극도 좋든 싫든 계속해서 반복되면 우리에게 느껴지는 반응 역시도 차츰 완화되어 나중에는 원래의 기본 상태로 되돌아오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내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분 좋은 느낌을 계속 얻기 위해서는 자극이 점점 더 세져야만 합니다. 마약뿐 아니라 술, 맛있는 음식, 더 많은 돈, 더 큰 권력을 추구하게 되는 것도 쾌락원에 대하여 내성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사우나의 예를 들면 사우나를 자주 하는 사람들이 일반인보다 더 높은 온도에서 잘 견디는 것은 밖으로 나왔을 때의 행복감 때문입니다. 마라톤 역시 비슷합니다. 장시간의 마라톤을 하다보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극한 고통의 순간이 찾아오지만 바로 그때에 잠시잠깐의 아주 기분 좋은 상태(running high)를 맛볼 수 있기 때문에 그 힘든 마라톤을 또다시 하는 것입니다. 고통이라는 관문을 통하지 않고는 참된 만족감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는가봅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날마다 먹으면 싫증이 나고 나중에는 혐오감을 유발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며칠 동안 굶으면 아무리 맛이 없는 음식도 아주 맛있게 느껴집니다. 고통과 쾌락은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이 둘은 언제나 함께 짝을 이루면서 서로를 따라다닙니다. 쾌락 뒤에는 고통이 그림자처럼 따라오고 고통 뒤에는 기쁨이 따라오는 법입니다.

인도에 의료선교사로 가서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였던 한 외과의사는 어느 날 자신이 그 병에 걸렸다고 착각하고부터 심한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다고 술회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의사들한테 가서 자신이 나병에 걸렸는지 아닌지 특히 온몸의 피부에서 통증을 느끼는지 못 느끼는지에 대해 자세한 검사를 받고나서 한센병이 아니라는 확진을 얻은 후에야 그가 통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의 책 무통의 고통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몸 곳곳에 통증을 느끼는 통감수용체가 없고 또 통증을 전달하는 신경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가시밭을 맨발로 걸어가도 아프지 않고 뜨거운 불을 만져도 통증이 없으므로 몸을 함부로 다룰 것입니다. 그 결과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고 세균이 침범하여 고름이 나서 급기야는 사지를 절단해야하는 경우도 생길 것입니다. 또한 통증은 질병의 초기에 나타나는 하나의 sign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통증이 전혀 없다면 모든 병을 키우게 되어 마치 암처럼 나중에야 알고는 전혀 손쓸 기회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육체적 통증이든 정신적인 고통이든 간에 당하는 당사자는 너무나 힘이 들어 회피하고 싶은 마음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약의 말씀으로 위로해 줍니다. <여러분이 당하는 시련은 모든 사람들이 다 당하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고통당하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시험과 함께 벗어날 길도 마련해주셔서 그 시험을 능히 견뎌낼 수 있게 하십니다.> 또한 <시련을 견디어내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련을 이겨낸 후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자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눈물 김현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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