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희 광양보건대학교 교수

현대 언어학 분야의 혁명적 존재인 미국 MIT대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교수는 1986년에 쓴 저서 ‘언어지식’(Knowledge of Language)에서 인간의 생득적 언어능력에 대한 독창적인 이론과 가설을 제시했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의 언어 습득과정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인 의문을 제시한다. 그 하나는, 어린 아이는 모국어를 습득하는 동안 주변으로부터 빈약하고 오류투성인 용례들로 언어 자극을 받는다.

그럼에도 이 아이는 그런 형편없는 자료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완벽한 모국어 능력을 갖추게 된다. 자극의 빈곤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능력을 갖추게 되는 이 수수께끼 같은 현상을 촘스키 교수는 ‘플라톤의 문제’(Plato’s Problem)라 불렀다. 다른 의문 하나는 ‘오웰의 문제’(Orwell’s Problem)라고 이름붙인 것인데, 모국어를 습득할 때와 달리 최상의 교재와 정선된 발음자료 그리고 엄선된 원어민 교사에게서 오랜 시간 외국어를 배우지만, 도대체 왜 우리의 외국어 실력은 그렇게 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촘스키 교수는 플라톤의 문제와 오웰의 문제의 관점에서 언어 습득과 언어 능력을 설명하지만,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같은 문제의식으로 우리의 정치와 사회를 바라보기를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제안한다. 특히 ‘접근할 수 있는 그렇게 많은 정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렇게 아는 것이 없는지’ 묻는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답하기를, 미국의 침략적 행위와 인종차별적 정책들을 예시 근거로 제시하면서 지배세력이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세계적 사안들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를 얼마든지 왜곡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접근할 만한 많은 정보가 있음에도 우리가 아는 게 없다면, 누군가 혹은 어떤 세력이 우리가 그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고 있지 않은지 의심할 만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과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고발한 기자 블라디미르 단체프(Vladimir Danchev)를 소개하며 이 책과 다른 저술들을 통해 언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였다. 언론이 정보와 사건들을 선별하여 접근하고 공개할 뿐만 아니라 해석까지 덧붙이면 자칫 사실 조작을 넘어 역사 왜곡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경고하였다.

몇 년 전에 나는 통영 장사도에 나들이한 적이 있다. 섬을 둘러보고 뭍으로 나오는 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중년 남성들이 둘러앉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화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화제가 화제인지라 나는 그들의 대화에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게 됐다. 경상도 억양에 다소 격앙되기까지 한 목소리로 각기 자기주장을 하는데, 요지는 군인에 의한 민간인 살상은 없었다는 점과 항쟁에 참여한 당시 광주시민들은 모두 빨갱이였다는 것이다. 군인들이 제나라 민간인을 살상하는 일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느냐는 반문도 이어졌다.

그러니 그런 일은 애당초 없었다는 것이다. 추론 형식의 언표와 달리 그것은 이미 확신이었다. 무엇이 이들의 사고체계 속에 이런 잘못된 확신을 심었을까? 직접 경험하지 않은 사실에 대한 왜곡된 확신은 독재와 권위주의 시절을 지나 최근까지 이어진 불통의 시간 속에 살아오면서 일부 언론들과 지식인들 그리고 책임 있는 관련자들이 저지른 여론 조작의 행태에 일반의 사유체계마저 길들여진 탓은 아닐까.

지난 정부에서 빚어진 국정농단 사태를 통해 우리는 정보의 독점과 통제가 빚어내는 부정적인 상황을 목도했다. 동시에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종편 뉴스 채널 한 곳이 진실을 추적함으로써 잘못된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잡는 대변혁이 시작되는 것도 경험했다.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둘러싼 많은 일들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 촘스키 교수를 비롯한 102명의 국제평화활동가들이 사드(THAAD)의 한국 배치를 왜 반대하고 있는지, 강들은 왜 해마다 녹조로 신음해야 하는지, 세월호의 진실의 시계바늘은 왜 그날에 멈춰 아직까지 움직이지 못하는지,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

새 정부의 시작과 함께 우리 사회에 시급히 필요한 것은 정보의 투명한 공개, 진실을 이야기하는 언론 그리고 국민의 알권리를 지키고 소통을 넓히려는 사회적 노력이 아닐까 싶다. 그동안 풀지 못한 채 우리 사회에 숙제로 남아 있던 오웰의 문제와 이제는 그만 이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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