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도화지에 그리는 나만의 세상

이은미 작가

작은 골목길에 찾아든 볕

유년 시절의 삶이 서려진 골목길, 한걸음 사뿐히 내 딛을 때마다 까르르 아이들의 찬란함이 번진다. 작은 골목길 사이로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보글보글 된장찌개 끓이는 소리만으로도 앞 집 영철이 아버지의 퇴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고, 고소하고 기름진 고기 냄새가 풍길 때면 숟가락 하나 들고 순희네를 달려가기도 했다.

친구들과 모여 새참으로 나갈 할아버지 막걸리를 몰래 마시다 대낮에 얼굴이 벌게진 날도 있었다. 어머니에게 밥주걱으로 머리를 콩 맞아도 이미 세상은 내 것이었던 시절. 밥 끓는 소리가 시계가 되고 붉은 빛 도는 노을이 달력이 되고 반복되는 풍경은 지난날의 일기장이 됐다.

농부의 꿈으로 출렁이던 푸르른 논밭 위로는 언제부턴가 길게 뻗은 몸매가 매력적인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생기 가득했던 골목길은 어느 노인의 깊은 주름이 됐다.

바라보기만 해도 행복하다는 작가의 방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물감과 붓만 있으면 어디든 출동

“할머니~저 왔어요”

“누가 왔나”

“골목길에 그림 그리러 왔어요!”

여기 쓸쓸한 잿빛 표정으로 가득 찼던 광양읍 작은 골목길을 생기발랄한 여대생의 풋풋함처럼 변신시켜줄 이은미 작가(49)가 있다. 이은미 작가는 한국수채화협회 소속 작가로 등록돼있다. 그림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6년도. 사곡초, 광양여중을 거쳐 순천여상을 졸업한 이 작가는 처음에 붓을 잡는 방법도 자세히 몰랐다.

중학교 시절, 미술 시간이었다. 소묘를 그리는데 미술 선생님이 “은미야, 너 혹시 따로 그림 배우니”라는 한 마디가 고요했던 마음을 출렁이게 했다. 이 작가는 하우스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도와 손에 흙을 묻히는 일에는 일가견이 있었지만, 붓이라곤 잡아본 일이 없다. 그날 이 작가는 하교하는 길 내내 웃음이 났다. 그가 미술 교사에게 받은 건 칭찬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하지만 희망을 희망으로만 기억해야했다.

학교를 졸업한 뒤 취업준비에 매진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불쑥 ‘그림’이 떠올랐다. 짝사랑 중인 사람처럼 누구에게 들킬까 안절부절 못했다.

절실함의 힘은 세다. 현실이라는 핑계를 이기고 다음에 라는 게으름을 던져버리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아동미술지도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금호동 부덕사에서 한국화를 배우기 시작해 광양여성문화센터 등을 통해 꾸준히 작품 활동을 펼쳤다.

행복했다. 흰 도화지 앞에 앉으면 두근두근 거렸다. 붓만 잡으면 7시간이 후딱 지나가있었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7시간들이 모여 어느덧 19년차 작가로 거듭났다. 이 작가는 “그림은 ‘인생’그 자체다”며 “온 몸이 녹초가 되도 그림을 그리러 간다는 생각만 하면 벌떡 일어나지더라”고 즐거워했

다.

노란빛으로 가득한 풍경을 좋아한다는 이 작가.

그림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이 작가가 벌교를 지나 한 작은 마을에서 벽화 작업을 할 때였다. 한 할머니 댁 골목길을 일주일 내내 작업을 했지만, 할머니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작가는 “어느 한 할머니 댁 골목길을 일주일동안 작업을 하는데, 밖에 어르신이 한 번도 나오시길 않더라”며 “뒤늦게 알고 봤더니 할머니는 우울증이셨다. 내가 작업을 마치고 갈 때마다 나와서 과정을 지켜 보셨다더라. 어두운 분위기만 풍기던 벽이 활기차지니까 손자손녀가 온 것처럼 보여서 감동을 하셨다고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 작가는 작업을 마친 후,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갈참이었다.

그때, 할머니가 이 작가의 소매를 끌었다. “대단한 반찬은 없지만, 밥한 끼 먹고 가”라며 할머니는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푹 삶아진 라면 한 그릇이 이 작가의 앞으로 놓여졌다. 후루룩 한 젓가락을 먹는데 덜컥 눈물이 나올 뻔 했다.

이 작가는 생각했다. ‘이 맛이구나, 이 맛에 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거구나’ 라고. 이 작가는 “진정한 마음이라는 것이 뭔지 그림을 통해 많이 배웠다”며 “밥을 다 먹고 가려는데, 할머니가 감자, 당근 몇 개, 상추 등을 손에 쥐어주시면서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더라”고 마음이 찡했다고 말했다.

이 작가 그림의 첫 번 째 팬은 바로 ‘어머니’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가르치지 못한 것을 늘 마음에 담고 있는 어머니는 이 작가의 그림을 볼 때마다 마음이 미어져온다. 하지만 이 작가는 말한다. 그림을 그리는데 가장 큰 재료는 바로 ‘그런 것’들이라고. 그는 “지금부터가 내 작품이다. 지금까지는 모두 다 과정 이었다”고 말한다.

작가의 꿈은 소박하다. 시골을 돌아다니며 할머니들과 함께 고무신에 그림을 그리는 것. 이 작가와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고무신에 꽃을 그리며 ‘꽃길’만 걷길 바라본다.

붓과 물감만 있다면 모든 것이 스케치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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