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마을 손님들과 '송 통장'

어떤 벽은 오드리 햅번이 사랑스럽다. 또 어떤 벽은 마릴린 먼로가 도도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사자에게 꽃을 주는 소녀를 만나기도 하고, 비 오는 날 노란 우비를 입은 아이들을 만날 수도 있다. 이번에는 오래된 추억이 변화하고 있는 광영동으로 향했다.

3통의 주민들을 책임지고 있는 송귀순 통장(58)을 만나기 위해 갖가지 이야기들의 벽화를 보며 걷다보니 어느새 골목을 쓸고 있던 송 통장이 반갑게 맞아준다. 송 통장의 집 마당에 들어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화단에 한가득인 ‘설악초’였다. 흰 꽃과 함께 잎마저 하얀 설악초는 환하게 웃고 있는 송귀순 통장과 참 많이 닮았다.

화단 한편에서는 마을 어르신 두 분이 사이좋게 ‘먹때깔’(까마종이) 열매를 따서 입에 털어 넣는다. 한 어르신이 입 안 가득 ‘먹때깔’을 부어주니 알맹이가 톡톡 터지며 달달하다.

송 통장이 어르신들께 막걸리를 따라드린다. 마당에 들어오는 볕도 좋고 이야기를 하며 막걸리를 주욱 들이켜다 보니 다들 얼큰하게 술기운이 올라왔다.

미용을 배워 서울의 백화점 등에서 일을 하던 송 통장은 처음엔 결혼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친척의 중매로 마지못해 읍내 한 다방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25살 꽃 같은 나이에 광영동에 정착하게 됐다.

송 통장은 전 동장의 추천으로 통장 일을 시작하고 처음에는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음식물 쓰레기 처리하는 방식의 변화와 도로명 주소 변경 등 어르신들을 일일이 찾아가 설명해도 한동안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늘 송 통장이 다시 마무리를 해야 했다. 그렇게 매일같이 마을 음식물 쓰레기통 주변을 청소하고 부족한 부분들을 하나 둘 고쳐가다 보니 어느새 지금은 마을 일의 베테랑이다.

송 통장은 “어느 날 이현숙 큰그림기획연구소 소장이 광영동을 둘러보게 됐어요. 그러다 정말 벽화를 그리기 좋은 마을이라며 무료로 하나 둘씩 그리기 시작했죠”라며 벽화의 시작을 회상했다. 또한 “예전엔 사람도 많이 줄고 해서 아무래도 마을이 좀 휑한 느낌이었는데 요즘엔 벽화들로 인해 마음까지 따뜻해요”라며 “이 소장이 무인 커피숍을 운영해 많은 지역 예술인과 마을 사람들이 사랑방으로 애용 중이죠”라고 덧붙였다.

송 통장의 집도 늘 마을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매일 집에 찾아오는 마을 어르신들과 일 년에 한 두 번씩 효도관광을 다녀오기도 하고, 잔치도 자주 연다. 올해로 통장 일을 수행한지 6년차를 맞이한 송귀순 통장은 마을의 심부름꾼을 자처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넘기는 법이 없는 송 통장은 매주 토요일마다 마을 어르신들께 따끈한 국수를 드리는 봉사를 4년째 하고 있다.

송 통장은 “통장 직을 끝내기 전에 드래곤즈 거리 조성에 맞춰 마을 인근에 광장이 설치됐으면 좋겠어요”라며 “광장에서 플리마켓과 각종 봉사활동은 물론 다양한 축제 장소로 활용됐으면 해요”라고 전했다.

취재를 마무리 짓던 중에 마을 어르신 한분이 또 송 통장의 집을 찾아왔다. 요가 수업을 듣고 왔다는 어르신과 함께 또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어르신들께 인사를 드리고 송귀순 통장의 집을 나와 마을 골목을 벗어날 때까지 송 통장의 집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한때는 광양에서 가장 활발했던 광영동. 세를 내줄 방이 부족할 정도로 사람들이 북적거렸지만 지금은 셋방들이 텅텅 비어버린 마을. 송 통장은 늘 바란다.

“늘 마을이 활력이 넘치고 주민들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송귀순 통장의 바람대로 광영동은 다시 일어서고 있다. 오래된 추억들이 아름답게 되살아난 벽화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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