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산 김성탁(1684~1747)

광양에서 10년 유배...용선암, 황룡사서 후학양성

다압의 유배길

과거 군수가 광양에 첫 부임해 순시 하는 곳이 다압이었다. 산간으로 이뤄진 다압은 주로 땔감을 하동 등지에 팔아 생활고를 해결했으니 가난 그 자체였다. 그러기에 군수는 다압에 들릴 때면 손수 가정집 솥뚜껑을 열어 보는 것이 일과였다. 솥단지 안에 일용할 양식이 있는지 확인한 것이다.

그러니 조선시대에는 오죽했을까. 그래서 대학자들을 산간오지인 다압으로 유배시켰을까?.조선시대 형률의 근간이 되었던 ‘대명률’에서는 유배지를 2천리, 2천5백리,3천리 등 세등급으로 규정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토가 광대한 중국에 기준한 것이어서 조선에는 이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서 세종은 조선의 실정에 맞춰 유배형을 약 600리,750리,900리로 등급을 조정했다. 유배지는 유배인이 관직자일 경우 의금부, 관직이 없으면 형조에서 배정했다.

그래도 750리 유배길인 광양은 나은 편이다. 왕의 윤허를 받아 유배지가 정해지면 대부분 경남 거제와 남해, 전남 진도에 보내어지고, 마지막으로 죽거나 말거나 보내는 곳이 제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배지의 경우 경치가 수려한 곳은 다들 두려워했다. 그 이유는 몸의 장기에 바닷가의 음습한 기운 때문에 허해지는 것은 물론, 유배인이 고분고분하게 된다는 이유에서다. 고산 윤선도가 함경도로 유배되었다가 양이(감형)돼 옥룡 추동마을에서 글을 썼듯이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또한 제주에서 다압 섬진으로 양이 돼 와 후학들을 가르쳤다.

갈암 이현일의 애제자 김성탁

숙종 10년인 1684년 8월 12일 영양현 청기리에서 태어난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은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진백(振伯)이며 할아버지는 생원 김방렬(金邦烈), 아버지는 김태중(金泰重), 어머니는 순천김씨(順天金氏)로 호군 김여만(金如萬)의 딸 사이에 4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성탁은 영양군 청기리에서 태어났으나 선조들은 모두 안동시 임하면 천진리에 세거하였다. 6대조인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별업(別業)이 이곳 영양 청기에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 김태중이 잠시 이곳에 우거하였으나 이후 다시 안동에서 주로 거주하였다.

김성탁은 어려서부터 문장에 통달하여 각광을 받았다. 숙종 26년 17세에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아울러 적암(適庵) 김태중(金台重)과 밀암(密庵) 이재(李栽)에게도 배웠으며, 고재(顧齋) 이만(李槾)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안무사(按撫使) 박사수(朴師洙)의 초청을 받아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 강좌(江左) 권만(權萬) 등과 창의하여 토역문(討逆文)을 지어 각지 유문(儒門)에 보내 의병 가담을 적극 권하였다. 그 공로로 안핵사(按覈使)의 천거로 참봉이 되었다.

1734년에는 광양 성황이 조선에서 제일 살기 좋은 곳으로 극찬했다고 전해지는 어사 박문수(朴文秀)와 이조판서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다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감진어사(監賑御史) 이종백(李宗白)의 추천으로 사과(司果)에 기돼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에 제수되었는데 재임 중 상소하여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를 건의하고 왕도정치를 행할 것을 촉구했다.

1735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이어서 사간원정언, 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후 광양과의 10년 이라는 기나긴 인연이 시작된다. 한마디로 운명이 바뀌는 결정적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1737년 이뤄진 스승 이현일을 위한 신원소(伸寃疏)때문이었다.

섬진마을과 인연을 시작하다

김성탁은 애제자로서 스승 이현일의 누명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충심의 발로에 다름 아닌, 이른바 구명을 위한 상소를 올렸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7개월 후인 1738년 6월, 광양 섬진마을로 유배돼 왔으니 그의 나이 55세였다.

김성탁과 광양의 인연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스승 구명을 위해 상소를 올려 유배를 왔는데 스승인 갈암이 먼저 유배왔던 광양, 그것도 지척의 인근 마을이니 감회가 얼마나 서렸을까. 갈암이 외압마을 갈은리에서 유배 중 해배 후 39년이 지나 자신이 이곳으로 왔으니 말이다.

제산은 섬진마을에 도착해 스승을 그린다. 인근 외압마을의 갈은리가 아직도 불리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는 갈암선생이 종성으로부터 이곳으로 유배돼 그때 살던 민가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어 갈은리라 불린다고...재령이씨 종친회는 그동안 선조 갈암이 우거한 다압의 갈은리를 그렇게 찾으려 수 십 년을 백방으로 찾아 나섰으나 광양시민문의 유배지기행을 통해 자취를 찾았다고 감사를 표했다. 갈암과 제산의 뗄 레야 뗄 수 없는 이런 연유가 시작된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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