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종렬 광양사랑의교회 목사

라종렬 광양사랑의교회 목사

어릴적 시골에서는 마을의 치로사업이나 여러 공사에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는 부역(賦役)이 많았습니다.

부역(賦役)의 역사는 오래전으로 가겠지만 국가나 공공 단체가 특정한 공익 사업을 위하여 보수없이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책임을 지우는 노역으로 옛날로 치면 역(役)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로 치면 열정페이와도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역은 동원하는 이와 부역(赴役)하는 이들이 공동의 목적에 동의할 때에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동원하는 이가 무리한 욕심을 부리거나, 부역(赴役)하는 이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을 경우 많은 부작용을 낳습니다.

부역(赴役)을 기피하는 경우도 그렇고, 할 수 없어서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다른 금전적 요구를 하여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부역(賦役)도 강제적 부역이 있고 자발적 부역이 있습니다. 전쟁이 아닌 평시의 상황에서의 부역은 상당한 부작용이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조선시대의 역(役)이 열정페이였다면 근현대사의 새마을운동이나 산림녹화 사업들에 동원된 많은 부역(賦役)도 열정페이라는 명목하에 기실 노동력 착취에 해당되는 사례들로도 볼 수 있습니다.

민방위 훈련도 이러한 부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직도 부역을 시켜 놓고서 충분한 보수는 커녕 아예 무보수로 공사를 진행하는 일들이 버젓이 자행된 것입니다. 이 일에 희생되는 이들은 역시 힘없는 민초들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권력과 가진자들의 결탁으로 행해진 강제 징발을 통해서 유익을 본 것은 부역하는 사람이 아니라 동원한 사람들의 목적을 이룬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태백산맥>에서 보면 밤에 빨치산들이 마을로 내려와서 낮에 국군을 도와준 부역(附逆)자를 인민재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누군가의 말한마디에 사람의 생명이 오가는 순간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낮이 되면 이번에는 국군들이 와서 지난 밤에 반란군들에게 부역한 이들을 또 찾아서 처단합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역자(附逆者 collaborator)는 전쟁 중 점령당한 지역에서 점령군에 협조하거나, 식민지에서 지배국가에 협조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명한 부역자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에 협조한 유럽인들이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부역자가 꽤 있었는데 문제는 부역자를 처벌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적인 원한이 있던 사람을 공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역자(附逆者)들 중에는 자발적 부역자가 있고 강제 부역자가 있습니다. 강제 부역자는 말 그대로 본인이원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강제적으로 징용되거나 징병되는 경우입니다. 이런 이들까지 같은 부역자로 처벌되는 것은 참으로 억울한 일입니다. 이들에 반해 아예 자발적으로 부역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서 반란군이나 점령군들에게 협력하는 경우입니다. 일제강점기의 친일파, 독일이 동유럽을 점령했을 때 유대인이나 저항군을 솎아내는 데 협조한 현지민등이 있스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에서도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감정적으로 치우쳐서 강제와 자발적 부역을 구분하지 않고, 역시 개인적 원한 관계 속에서 무고한 이들이 처벌 된 사례들도 많습니다.


2500여년 전 고대 근동의 남유다라는 나라가 종교적으로 부패해지고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상황 속에서 나라가 존폐의 위기에 처했을 때입니다. 남쪽으로는 애굽이라는 나라가 북으로는 앗수르가 기울고 신바벨론이 부상하면서 북아프리카를 넘보며 남하하는 상황에서 유다는 친애굽이냐 친바벨론이냐를 두고서 치열한 외교전을 펼치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소위 예언자들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며 외교적인 정체들을 지혜롭게 잘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던 거짓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잘못된 상황판단과 거짓 메시지에 부화뇌동해서 함께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부패하여 결국 멸망으로 치달을 때에 백성들은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지도자들의 잘못에 왜 자신들까지 함께 벌을 받아 망해야 하는지 말입니다. 이에 참예언자의 답변은 그런 잘못된 예언을 분별하지 못하고 결국 따른 데에는 자신들의 욕심과 유익을 다른 행동이었고, 강제적으로 부역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부역한 것과 마찬가지 행위기에 함께 벌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중립도 침묵도 결국은 암묵적 동조요 부역(附逆)자와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익에 부응하는 지도자나 말을 따르고 애써 그런 내면을 가리기 위해서 핑계할 뿐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적폐나 부역자(附逆者)라는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공교롭게도 강제적 부역자보다는 자발적 부역자가 많은 것 같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의 이익에 부응해서인지 여전히 이 부역행위에 대해 부끄러운 줄 모르도 버젓이 동조행위를 하고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하는 부류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을 처리해 가는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이 있어서도 안되고 감정적으로 치우쳐도 안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정당한 절차를 따라 진행되는 일들마저도 부정적으로 매도하고 급기야 자신들의 부역행위를 정당화하고 적반하장격으로 행동하는 것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국민들은 이미 부정한 국가의 부당한 부역(賦役)에 많은 부역(赴役)을 감당하고도 제대로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부당한 이들에 빌붙어 자신들의 유익을 탐한 부역자(附逆者)들은 여전히 권력과 경제와 심지어 법과 공권력을 좌우하고 있습니다. 하루 빨리 이러한 잘못된 부역에 대한 역사가 청산되고 일한 만큼의 대우를 제대로 받고 힘없는 이들도 잘 살 수 있는 공의와 정의가 바로 세워지는 나라로 세워질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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