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내가 살고 있는 우리 집 옆에는 큰 형님네가 살고 있는데 그 집 작은 앞마당에는 오래된 팽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팽나무는 오래전부터 집 마당을 제 것인 양 통째로 차지하고 있으며 집의 입구와 둘러싼 담벼락에 이르기까지 그의 육중한 몸통과 뿌리를 내리고 있다. 게다가 몸통에서 힘차게 뻗어나간 무수한 잔가지들이 하늘을 빼곡히 채워서 팽나무의 영역은 집 전체를 아우르고도 남는다.

그러나 정작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팽나무의 위용에 눌려서인지 나무에 딸린 작은 부속물처럼 보잘 것 없어 보인다. 그곳에서 살고 있는 주인은 애초부터 집을 보기 좋게 고쳐서 나무에게 눌린 기세를 찾으려는 그런 욕심은 버린 듯했다.

기껏 해야 집안에서 팽나무를 잘 바라볼 수 있도록 큰 통 유리창 하나만을 내어놓고 창을 통해 철따라 나무가 선물하는 풍광을 즐기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그 모습은 자연과 인간의 삶이 어떻게 하면 가장 조화로울 수 있는 것인지 모범답안을 제시하듯 자연스러웠다.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선조의 선조로부터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팽나무의 나이는 대략 350 년쯤 되었다고 한다. 또 팽나무 아래로는 방금 땅을 뚫고 솟은 듯한 맑은 시냇물이 소리 내어 흐르고 큰 뿌리가 드러난 높은 돌담에는 긴 세월을 머금은 이끼가 아직 파릇하게 살아있었다.

팽나무 한그루와 그를 둘러싼 높은 돌담은 흐트러짐 없는 양반의 자존심처럼 마을의 오랜 품격을 지키고 있었다. 나이는 많지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팽나무는 새로워진다. 봄이면 고목의 잔가지마다 빈틈없이 연초록의 새싹들이 돋고 그의 하늘을 잎으로 덮어버린다.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긴 뿌리에서 시작된 작은 영혼들이 하나 둘씩 깨어나서 그들의 우주를 이루는 모습을 볼 때마다 신비로움에 가슴이 두근두근 방망이질 치곤 한다. 시냇가로 드리워지는 여름의 무성한 잎들도 노랗게 물드는 가을의 단풍도 해마다 그런 모습으로 우리 가슴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팽나무집 형님은 어느 겨울 서울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우리 동서 삼형제 가족을 불렀다. “동생들에게 꼭 보여줄 게 하나 있어, 이번에 꼭 내려와야 해 " 평소와는 달리 형님의 간곡한 당부에 바빠서 못 간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형님은 우리에게 팽나무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내가 처음 만난 팽나무의 인상은 어느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압도감이었다. 마치 큰 산 하나가 앞마당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세상의 어떤 강하고 높은 존재도 그 앞에 서면 머리를 조아릴 수 밖에없는 하찮은 미물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는 우리와는 절대 동격일 수 없는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절대자였지만 현재를 함께하는 친근한 이웃이기도했다. 나무는 긴 세월동안 쉼없이 자신의 가지와 뿌리의 영역을 넓혀왔다. 한 줄기에서 시작된 가지가 다른 가지를 이어가고 첫가지는 굵은 줄기가 되고 다시 다른 가지를 품고 이어가는.........

그처럼 반복된 삶으로 팽나무는 하늘에서 일가를 이루듯 큰 숲이 되어 있었다. 늘 머릿속에 꿈꾸고 있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그런 세상에 내가 와있는 느낌이었다. 매번 허둥지둥 숨막히는 도시와는 달리 자연을 일상으로 누리고 사는 형님의 산촌 생활이 한결 느긋하고 고급스러웠다.

인간다운 삶이란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순응하며 보호를 받는 것이란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팽나무 때문에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나의 오랜 욕망들과 도시에서의 삶이 서로 충돌하며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그 때 받은 팽나무의 강한 자극이 결국 나를 이곳 산촌마을로 안내를 해 준 셈이다.

내가 이 곳으로 터전을 옮긴 후로 손윗 동서 두 가족이 차례로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니 팽나무 하나가 우리 가족 모두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친 셈이다. 심지어 그 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 가슴 속에는 팽나무가 아직 튼튼하게 자리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요즘은 어딜가거나 쉽게 만나게 되는 고목들이 예사롭지 않다. 나무도 자연도 결국 우리에게 아름다운 풍경과 세상을 넓고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감성을 선물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그 존재가치가 크다. 서성이는 사람들에게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고 항상 그 자리에 남아서 묵묵히 힘이 되어주는 나무, 그의 넓고 깊은 존재감!

살아갈수록 나도 나무의 그런 모습을 닮고 싶은데 생각해보니 그게 가당치가 않다. 일단은 내가 팽나무처럼 오래 살지 못하며 누구에게나 이로운 일을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이라서 열심히 해야 할 일은 자연 가까이 살며 계속 나무를 심는 일인 것 같다. 그러다보면 내가 이루고 싶었지만 못다 이룬 일들을 나무들이 오래 살아남아서 대신 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이러한 생각 또한 그동안 팽나무의 가르침에서 얻은 것 이기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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