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문화원 광양학연구소장 정회기

▲ 정회기 광양문화원 광양학연구소장

1970년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우리집으로 가는 길목에는 늘 우리의 발걸음을 잡아끌던 잡화점인 남문상회가 있었고 그 옆으로 어깨를 기대듯 우리상회, 통술집, 제일주유소, 남문세탁소, 선미이발소, 주약국이 나란히 서 있었다. 그리고 차부 건너편으로 신광무선이 있었다.

신광무선 내부에는 전축, 전축판, 기타 그리고 한 두 대의 흑백 텔레비죤이 있었는데 그중 한 대는 밖에서도 볼 수 있게 놓여져 있었다. 서국민학 교를 다닌 나는 수업이 끝나면 가방을 집 마루에 팽개치고 곧장 텔레비젼을 보기위해 차부 앞의 신광무선으로 달려갔다. 주인아저씨는 종종 차부를 빠져나가는 버스가 일으킨 먼지를 원망하며 물을 뿌리곤 했다. 이 때는 하루종일 버스의 진출입을 돕는 재만이가 가장 바쁜 시간이기도했다,

“오라이! 오라이! 빠꾸 빠꾸! 스톱!”

재만이를 잘 몰랐을 때는 눈이라도 마주 치면 무섭 기도 했지만 커가면서 점차 서로에게 익숙해졌고 큰 소리로 장난을 치곤했다. 그러나 세월이 언제 그렇게 흘렀는지 재만이도 어떻게 사라져 갔는지도 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추억속에 남아 있는 어리숙한 어른이었다.

신광무선 아저씨가 뿌리는 물을 피해 옴팍하게 자리잡은 나는 텔레비죤이 켜지는 순간을 무척 기다렸고 주변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내게 텔레 비죤을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였기 때문이다. 신광무 선은 불행하게도 군청에 다니 시던 아버지의 퇴근 길목이었다.

나는 매번 퇴근하시는 아버지께 귓 볼을 잡혀 집에까지 끌려갔다. 아버지는 내가 길거리에 앉아 텔레비죤을 보는 것도 싫어 하셨지만 저녁 밥이 준비되는 시간이었고, 어머니의 성화때문에 날 잡아 갈 수 밖에 없었으리라.

신광무선에서 늘 길가로 흘러나오던 음악소리는 어두워질 때 쯤 멈추곤 했다. 한 번은 학교에서 가정 실태 조사를 했다.
“자기 집에 전화기 있는 사람 손들어!.. 다음에는 텔레비젼 있는 사람?”

자신감 넘치는내 손이 하늘 높이 올라갔다.

“저요!”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였음 에도 아버지는 텔레비젼을 장만하셨다. 아마도 나를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동네사람들이 당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연속극 ‘여로’를 우리 집 마루에서 볼 수있었던 것도 나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흐르는 세월에 밀려 50대 70대가 된 나와 아저씨는 중학교 앞에서 담배를 팔며 마지막으로 운영했던 신광레코드 가게에서 만났고, 옛날 신광무선과 기쁜소리사에 대한 추억을 함께 나누었다. 그러나 얼마전까지 굳게 닫혔던 가게는 다른 이름으로 바뀌어있었다. 수소문 끝에 농협 중부지점 에서 차장으로 일하는 그의 조카를 찾아 아저씨의 안부를 물었더니 지난해 돌아가셨다고 한다.

애써 오랜 인연을 덮으며 시계탑을 돌아 중앙무선 앞을 지나는데 훌쩍 지나간 옛시절과 아저씨 모습이 자꾸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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