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희 칼럼

▲ 김광희 광양보건대학교 교수

2018년 새해가 밝았다. 사람들은 대개 ‘드디어’나 ‘마침내’, ‘이윽고’라는 수식어를 붙여가며 새해를 맞는 감회를 말한다. 모두가 새해를 맞이하는 일에 제 나름의 의미와 기대와 소망을 이 한 마디에 담아낸다. 지난해를 힘들게 보낸 사람일수록 더 적극적이고 기대에 찬 수식어를 붙이려 한다. 그래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축복과 덕담은 새해를 맞는 모든 이의 공통된 바람을 담은 인사말이 된다.

지난해의 마지막 밤을 제야(除夜) 혹은 제석(除夕)이라 하고, 새해 첫 아침을 원단(元旦)이라 한다. 섣달 그믐날의 아침 해를 기다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원단의 해가 솟아오르는 첫 순간을 그토록 지켜보고 싶어 할까? 제야에는 왜 밤을 세워가며 불을 밝히고, 종을 울리는 것일까? 시간마저 양화(量化)의 틀로 재단하는 과학기술로 말미암아 우리는 미세할 정도로 분절된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그렇다면 제야와 원단의 경계는 어디쯤이며, 그 시간의 차이에는 무슨 의미가 담겼을까? 해가 바뀔 때마다 해보는 쓸데없어 보이는 물음들이다.

제야와 원단은 시간으로 환산하면 불과 1초도 안 되는 찰나의 벽을 마주하고 있다. 12월 31일과 1월 1일의 경계가 어디 만큼일지를 찾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 찰나의 경계 이쪽과 너머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인식의 틈으로 구별되고 또 확장되곤 한다. 이 차이는 인간 사유의 본질적 속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에 대한 인간의 사유는 두 가지 특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하나는 변화하고 움직이는 것을 포착하여 공간적이고 지속적인 범주로 묶어두려는 방식이다. 그 결과 인간은 시간을 계기적인 어떤 것으로 인식하는 것보다는 한 시간 거리, 하루치 일감, 보름의 휴가, 한 해의 결실 등 마치 어떤 공간이나 존재 양식처럼 이해하는 데 더 익숙하다. 동작의 대상을 명사처럼 이해하려는 인간 본성이 투영된 결과이리라. 다른 한 가지는 인간 본유의 종교성을 시간에 덧입히는 것이다. 제야와 원단이라는 명칭 자체가 단순히 12월 31과 1월1일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종교와 철학적 사상으로 각색된 결과물이다. 고대 아테네에서 그리스인들을 향해 “그대들은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라고 한 바울(Paul)의 연설에 기대지 않더라도 호모 릴리지우스(Homo Religius)의 속성을 근거 삼는다면 시간에 담긴 주술성은 그리 낯설지 않다. 그러니 한바탕의 인생에서 한 덩어리의 시간을 ‘덜어내는 날 밤’(제야)을 우리 조상들은 무의미하게 보낼 수 없었을 게다. 한 해 동안 켜켜이 쌓인 번뇌를 벗어버리기 위해 종을 쳤고, 국가의 태평과 백성의 안녕을 바라며 새아침을 기다렸을 터이다.

제야와 원단이 나뉘는 순간은 어찌 보면 찰나가 아니라 생의 큰 매듭이 아닐까 싶다. 지난 1년의 얽히고설킨 삶의 실타래를 이 순간에 묶어 마무리한다. 그것이 가지런히 풀린 것이든 헝클어져 도무지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없는 것이든 간에 우리는 그 모습 그대로 매듭을 지어 놓는다. 이때의 매듭짓기란 우리가 제 스스로에게 선포하는 일종의 해방과 자유의 선언이 될 수 있다. 기쁨과 즐거움이든 슬픔과 분노든 모든 것을 이 시점에서 매듭짓고, 사람들은 다시 새로운 실타래의 두서(頭緖)를 붙잡는다. 실 꾸러미의 중요한 꼭지를 붙잡아 인생이라는 또 하나의 구획된 실타래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원단은 그래서 새롭고 중요하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시 만들어질 인생사의 씨줄과 날줄의 가닥이 바로 이 순간부터 잡히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어디 세상에 가지런하게 술술 풀리는 인생이 있겠는가. 미처 풀리지 않고 해결되지 못한 채 매듭을 짓게 되면 나중에 넘어서야 할 고비가 되어 돌아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먼 훗날 긴 삶의 자취를 돌아보면 이 매듭들로 인하여 우리 삶은 여러 모양과 빛깔이 어우러진 인생이라는 장식이 되고, 이 장식은 어떤 가치기준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이 된다. 제야와 원단을 거듭 경험하는 일은 어쩌면 인생 예술을 만드는 과정이다. 심여공화사(心如工畫師)*라 하였으니 인생살이에도 장인정신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지 않겠는가.

*심여공화사(心如工畫師): 마음은 세상의 모든 것을 그려내는 솜씨 좋은 화가와 같다(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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