컵라면 한 젓가락으로 우정 나누고
얼큰한 국물로 언 마음 녹이는 21세기 사랑방
“자신이 살던 시골을 찾았다. 시골을 찾자마자 깜짝 놀란다. 바로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의 추억의 장소이자 영물이었던 왕소나무는 온 데 간 데 없고, 그곳엔 외양간만한 슬레이트 지붕의 구멍가게 굴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문구의 수필 <일락서산, 공산토월> 에 있는 한 내용이다.
외양간만한 슬레이트 지붕의 구멍가게도 어느덧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지금의 편의점이 됐다. 비록 겉모습은 변했을지라도 추억을 간직할 줄 아는 그 마음만은 여전한 광양읍사무소 건너편 한 편의점을 찾았다.
추억의 온상 ‘구멍가게’
현재 이 편의점이 있는 자리는 본래 작은 가게였다. 하지만 한창우(38)대표는 이 가게가 불이 켜져 있는 모습을 제대로 본 날이 거의 없다.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매일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한 대표에게 가게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곳이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더니, 20년 후, 같은 자리에서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는 한 대표는 “세상 일 참 모른다”라는 심심한 소리로 입을 뗐다.
한창우 대표는 광주에서 태어났다. 8살 때 광양읍으로 이사를 왔고, 광양중, 효천고를 졸업했다. 대학 전공은 경영학. 극심한 청년취업난 시대에 전공을 잘 살렸다.
무심코 지나가면 그냥 보통의 가게이지만, 이 가게에는 특별함이 있다. 인근에 주택가와 학교가 있어 유동 인구가 많던 시절, 이 곳은 사랑방이자, 광양읍 소식통의 일 번지였다. 지금은 그 단골들의 손자손녀가 편의점을 찾으니 21세기의 새로운 사랑방이다.
‘그리움’빼고 다 있는 곳
편의점에는 약 1만 7천여 개의 물품이 진열돼 있다. 건전지도 종류별로 있다. 사람보다 물건에게 힘을 주는 것이 더 중요해진 시대다.
한 대표는 어머니와 번갈아가며 편의점을 지키고 있다. 손님 입장에서는 바코드를 찍어주고 계산을 하는 것이 한 대표의 주 업무처럼 보이지만, 편의점은 보이지 않는 일들이 더 많다. 물품 정리, 재고 조사는 기본이고 서비스 업무, 택배, 고지서 납부, 홈쇼핑 반품 등 24시간 편의점이지만 24시간이 모자라다.
한 대표는 “하는 업무는 많지만, 손님 대부분이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이웃들이다”며 “힘이 들더라도 항상 반갑게 찾아주는 단골손님들을 보며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딸랑’ 편의점 문이 열린다. 방학을 맞이한 송민성·함채민(12)단골 손님이다. 이들의 꿈은 ‘편의점 사장’이 되는 것. 두 학생은 “라면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 같다”며 “편의점 사장이 되면 맛있는 것을 실컷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생각만 해도 좋다”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편의점 사장이라는 어린 시절 누군가의 꿈, 그 꿈속을 걷고 있는 한창우 대표. 물품 정리와 재고에 지친 날일지라도 단골손님들의 ‘꿈’을 지켜주는 편의점 대표가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