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문학연구보존회 ‘윤동주문학 국제학술심포지엄

윤동주 활용 위해선 정병욱 교수부터 정확히 알아야
‘정병욱 가옥 활용방안’에 대한 구체적 논의 없어 ‘아쉬움’

윤동주 시인과 유고보존가옥을 광양이 적절히 활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병욱 교수를 광양시민들이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제안이다.

(사)윤동주문학연구보존회는 지난 27일 호텔락희 연회장에서 ‘윤동주문학 국제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윤동주 문학 왜 광양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심포지엄은 윤동주 문학에 대한 이해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마련됐다.

그러나 5시간이 넘게 진행된 심포지엄이었음에도 정작 시민들이 관심을 가졌던 ‘정병욱 가옥 활용방안’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없어 아쉬움을 남겼다.

‘한국 현대시와 윤동주’를 주제로 첫 번째 발제에 나선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윤동주 시인에 대해 시간ㆍ공간ㆍ인간 등 3간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감옥에서 타계한 윤동주는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생애 마지막 경찰서와 감옥에 있었던 1년7개월을 빼면 그가 자유롭게 세상을 호흡한 ‘가록자로서의 생애’는 25년 6개월 15일이다.

윤동주는 거의 모든 작품을 20대 초반에 썼으며, 그에게 20대 후반이 허락됐다면 더욱 훌륭한 작품을 남겼을 것이란 게 유 교수의 설명이다.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윤동주는 명동소학교, 관립한족소학교, 평양 숭실중학, 서울 연희전문, 일본 릿쿄대학과 도시샤대학 등을 다니며 늘 학생신분이었다.

북간도를 떠나 평양 숭실중학에 입학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인지했으며, 연희전문에 진학하기 위해 북간도를 다시 떠나면서 북간도 공동체의 역사적 가치를 뚜렷하게 알게 된다.

한ㆍ중ㆍ일에 시비가 있고, 한ㆍ중ㆍ일에 기념사업회가 있는 유일한 시인인 윤동주는 지금의 중국 땅에서 태어나, 지금의 북한땅에서 조국을 처음 발견하고, 지금의 일본 땅에서 죽어, 다시 지금의 중국 땅인 고향으로 돌아갔다.

유성호 교수는 “우리는 윤동주를 ‘저항시인’으로 획일화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랑’과 ‘부끄럼’이라는 인류 보편의 윤리적 가치와 그것으로부터 비롯한 ‘저항’이라는 실존적 행위를 함께 기억해 가야한다”며 “이러한 반응을 통해 우리는 정체성 위기를 자기 발견의 계기로 삼은 시인의 투명한 시선과 언어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유 교수는 “윤동주는 세상에 드문 인간이며 윤리적인 힘을 가진 시를 통해 끊임없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시인이다. 그가 언어를 남겼는데 그곳이 바로 광양이다”며 “언어가 머물러 있다가 세상에 공개됐으니 서양 같았으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윤동주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 잘 활용되길 바란다”말했다.

이와 함께 “윤동주 시인을 광양이 적절히 활용하기 위해서는 정병욱 교수를 시민들이 정확히 알아야 한다”며 “정병욱선생 탄생 100주년도 준비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정병욱이 없었다면 윤동주는 세상에 없는 사람

일본 교토여자대학교 우에노 준 교수는 ‘예언시인 윤동주’를 주제로 한 발제에서 윤동주의 작품은 모두 116편으로 1934년 3편, 1935년 5편, 1936년 33편, 1937년 20편, 1938년 11편, 1939년 6편, 1940년 3편, 1941년 16편, 1942년 6편을 썼고, 그 후 작품이 80여 편이 있었다고 하나 일본경찰에 체포당시 압수돼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고 소개했다.

그는 “윤동주의 작품은 1939년 이전 작품과 이후 작품이 완성도는 물론, 작품에 담겨진 세계관도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며 “이 시기에 윤동주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근본적 회의를 느꼈으며, 일제치하에 신음하는 조국의 모습을 보게 됐다”고 밝혔다.

우에노 준 교수는 윤동주의 후기 시 전체에 깔려있는 개념으로 ‘원죄관’, ‘구원관’, ‘말세관’을 들었다.

우에노 준 교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했지만 주변에는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인 윤동주는 취미로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시를 통해 메시지를 남기려 했다”며 “가장 강력한 예언시인 중 한 사람이었던 윤동주는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그냥 바라기만 하는 게 아니라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윤동주의 문학이 앞으로는 한국문학사 속에서만 인식되는 애국 애족이나 편협한 문학사 폭거에 갇힌 시인에 그치지 않고, 더욱 확장되어 인류와 인간의 삶과 영혼 구원에 관한 문제로까지 확대되어 세계적인 문학인으로 각광을 받아야 할 시인으로 더욱 연구 발전할 수 있기를 바라며, 그러한 시인이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우리가 윤동주 시를 볼 수 있다는 것이 기적이다. 광양의 정병욱이 없었다면, 어머니의 노력이 없었다면 윤동주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윤동주 시인을 세상에 나오게 한 곳이 바로 광양”이라며 “광양 땅은 한반도에서 기적을 이룬 땅”이라고 강조했다.

광양에 보관된 19편은 윤동주의 생명

‘윤동주 시 다시 읽기’와 ‘윤동주 시에 있어 광양의 의미’에 대해 발제한 강희근 경상대 국문과 명예교수는 “윤동주 시 97편을 선입견을 지우고 다시 정독한 결과 윤동주의 시는 '순질의 언어'와 '십자가 언어'가 받쳐주고 있든 점을 확인한 했다”며 “순질의 언어는 윤동주의 동시로부터 기인하는데 주목할 수 있으며, 십자가 언어는 윤동주의 시 세계의 한 꼭짓점인 그리스도사상의 시편들에서 읽어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윤동주의 시는 언어적 두 개의 수레바퀴를 굴려서 민족정서의 기반과 민족의 지향점을 동시에 겨냥할 수 있었으며, 민족적이며 예언적이며 특이한 저항의 세계를 담보하는 작품들이 가능했다는 것.

강 교수는 윤동주 시의 4대 거점으로 △제1거점-소년시기 북간도 ‘명동촌과 용정’ △제2거점-연희전문 시기 서울 ‘연희전문학교’ △제3거점-일본유학시기 ‘릿교대학과 도시샤대학’ △제4거점-광복 후 시기 ‘진월면 망덕리 정병욱 가옥’ 등으로 분류했다.

강 교수는 “만약 윤동주의 원고가 광양에서 나오지 않았으면 어찌 되었을까? 소름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다”며 “광양에 보관된 원고가 있었기에 광복이후 윤동주의 아우 윤일중과 친구 강처중, 정병욱의 주선으로 1948년 1월 30일 마침내 첫 시집으로 나와 윤동주 시인은 그 이름값대로 부활했다”고 밝혔다.

그는 “광양에 보관된 19편은 윤동주의 생명과 같다. 윤동주는 광양 정병욱의 본가가 있어 살아있으며, 영원히 우리 국문학의 별로 떠 있을 것”이라며 “광양은 망덕포구의 그 수려한 경관과 함께 윤동주 시의 거점으로 민족시의 아름다운 향기를 뿜어 올리는 지역으로 빛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윤동주는 시의 별이고, 정병욱은 고전의 별이다. 윤동주만 할 게 아니고 정병욱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조명해야 한다”며 “앞으로 광양시의 윤동주를 중심으로 한 콘텐츠 개발과 실천에 따라서는 세계적인 공간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했다.

또 정병욱 가옥 활용방안을 묻는 질문에 강 교수는 “가옥 자체를 뜯어서 할 수는 없겠지만 그 주변 공간을 활용해 고전문학 교실을 수용하고 창조적 문학의 접근을 기하는 공간으로 활용했으면 한다”며 “고전의 공간과 현대식을 한 공간에 크게 확보하던지, 우선 공간을 만들고 교육이나 행사 등 연중무휴로 뭔가가 움직여지는 공간이 됐으면 한다”고 제안했다.

한편 이날 심포지엄은 윤동주의 생명과도 같은 19편의 윤동주 육필시를 보관한 광양의 중요성과 의미는 크게 부여했으나, 정작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더 이상의 제언은 나오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다.

진월면 망덕리에 위치한 정병욱 가옥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친필 원고가 보존된 곳으로 2007년 7월 3일 등록문화재 제341호로 지정됐으나, 적절한 활용방안을 마련치 못한 채 초라한 모습으로 간간히 관광객의 발길을 맞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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