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룡 황안과 원장

황호룡 황안과 원장

기독교가 생소하기만 하던 구한 말, 백운산 깊은 산골마을을 찾아든 이방인의 말 한마디가 광양을 비롯한 전남동부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가져다 줄 줄을 그 누가 알았으리요?

그날 역시도 장년 몇 명이 사랑채에 둘러 아 장난 같은 노름으로 시름을 달래고 있었지요. 곰과 범이 자주 출몰한다는 백운산 그 첫 마을인 곰골 (웅동마을)에 신분을 감추려고 숨어 들어온 두 사람도 그 중에 끼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고종임금이 베푼 과거시험에 당당히 급제하여 호남의 어느 고을로 첫 부임하여 삼년도 채 가기 전에 발발한 동학농민운동의 희생 제물이 되어 관직을 스스로 그만 두고 낙향, 그것도 아무도 모를 깊은 산골을 택하여 은둔생활하 다가 어느새 나이 40을 바라보는 박희원, 또 한사람은 민비를 처참히 살해한 후 본국으로 도망 가던 일본낭인을 끝까지 추적하여 인천에서 기어히 그 목숨을 취하고는 나라의 끝 광양 백운산 자락 깊은 골로 들어와 은신한 지 10년이 된 한 태원, 이 두 사람의 만남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맺어진 인연과 우정이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미 10년이 지나버린 사건인지라 당연히 잊혀질 만도 한데 일본은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지 일본인 낭인을 죽이고 오간데 없이 숨어 버린 한태원을 아직도 찾아내려고 관리들을 동원 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찾기 위해 광주에서 출발하여 곰골까지 방문한 관리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랑방 안에서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노름판이 한창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관리가 <광주에 가면 야소교라는 종교가 새로 생겼다고 하니 가보고 노름을 끊으라>고 넌지시 권하였다 합니다.

이 말을 함께 들은 박희원 서병준 장기용 세 명의 산골친구들은 날을 잡아 광주까지 걸어가서 양림동 책방에 근무하던 기독교 성도 조상학을 찾아 만납니다. 그를 통해 광주지역 책임자인 오웬 선교사를 만나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걷고 또 걸어서 자신들의 터전 곰골로 되돌아옵니다.

사실 조상학이란 분은 나중에 목사가 되어 동분서주 하면서 전남 동부지역에 복음을 전하려고 애쓰다가 여수 애양원 손양원 목사와 같은 날 같은 곳에서 순교하신 전남 동부지역의 자랑스런 믿음의 조상입니다.

이분 조상학과 한태원을 통하여 광양지역에 기독교복음이 전래된 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한태원이 양림동의 조상학 집에 잠시 머물면서 조상학으로부터 복음을 전해듣고 오웬 선교사에 게서 성경말씀을 배워오던 차에 곰골의 친지분 3 명이 야소교가 궁금하여 먼 광주까지 다녀왔다는 소식에 고무된 나머지 조상학과 오웬 선교사 두분을 백운산의 처소인 곰골 아랫마을 구황리로 초대합니다. 한태원 서재에 모인 9명의 친지들이 복음을 들 음으로 그날 9명 모두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날 새신자로 거듭난 이들 9명의 뜨거운 신앙의 불길을 그 누구도 잠재울 수가 없어 이들의 전도 활동으로 인해 거의 2년만에 육칠백 명의 신자들로 넘쳐나는 엄청난 대 부흥을 경험합니다.

심지어 하루에 세례받은 수가 120 명에 이르는 날도 있었다고 하니 이는 아마도 조선의 기독교 역사에도 극히 드문 이례적인 일일 것입니다.

백운산 아래 동네마다 기독교인들로 가득차고 특히나 기도처소가 있던 곰골 마을은 20호 100 여명의 마을 주민 모두가 다 기독교인이 되는 놀라운 쾌거를 이룹니다.

갑자기 교인들로 넘쳐난 이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뭐니 뭐니 해도 예배당 신축이었습니다.그리하여 박희원을 중심으로 전 교인들이 십시 일반 헌금, 신황리에 예배당을 건축하고 이 예배 당에 소학교(광신학원)를 열어 300명 아동들의 배움터가 되게 하였습니다. 이때가 한일합방 3년 전의 일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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