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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산 따라 남쪽 자락에는 황곡제가 있다. 황곡제 물길은 흘러 광양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는 황길 역이 있다. 황길역은 광양제철선에 있는 기차역으로 1987년 신호소로 영업을 시 작했다. 광양제철선과 광양항선의 분기 지점으로 신호 업무만을 수행하는 작은 역이다.

이 역 맞은편에 마을이 있다. 막 걸리와 함께 기동마을로 향했다. 기동마을은 벌등마을과 합쳐 불리는 이름이다. 광양시지에 따르면 현재는 바 닷가의 조그마한 마을이지만 원래는 벌 등마을이 문헌상 기록이 앞선다.

점점 기동마을이 커지고 이후 벌등마을은 행 정리상 기동마을에 소속됐다. 기동마을 은 ‘텃골’이라고도 하는데 이를 한문식으 로 그대로 써서 이르는 말로 본래 예부 터 있었던 마을터란 뜻도 있으나 사람이 살기에 알맞은 장소‧고을이란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벌등은 ‘뻘-등’에서 유 래된 말로 비교적 넓은 들판을 이루고 있는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고을이란 의 미를 지니고 있다. 마을은 현재 50세대 120여명의 인구수를 자랑하며 주 소득 원은 쌀‧고추‧마늘‧깨 등이다.

기동마을회관 외관

서동주 통장은 대대로 마을에서 살아 온 터줏대감이다. 통장직을 수행한지 올 해로 연속 9년차, 이전에 잠시 쉬기 전까 지의 기간을 합치면 13년의 시간을 마을 을 위해 일해 왔다. 서 통장은 “우리 마을 자랑하려니까 뭔가 부끄럽네. 그냥 인심 좋고, 욕심 없 고, 이제껏 큰 탈 없이 잘 지내온 것이 자 랑이제”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 통장은 이어 “우리 마을은 포스코 냉연부 박판제품공장이랑 자매결연을 맺은지 벌써 오래됐지. 2009년부터 였을 거야”라며 “매번 그분들이 마을을 와서 매실도 따주고, 고추대도 세워주고, 우리 마을서 나는 농산물도 구매해주니 늘 고 맙지”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기동마을을 위해 노후전선 교체, 마을 청소 등도 도맡아 한다고 한다. 서 통장은 주민이 알게 모르게 늘 마 을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또한 강할 때 는 강하게 표현하는 그의 성격상 어떠한 일을 처리할 때는 일사천리다.

기동마을 전경

그런 그 의 성격을 잘 대변해주는 일이 십 수년 전에 있었다. 서 통장은 “아마 15년 전쯤 이었을거야. 요 아래 뻘등마을 아재랑 이야기를 하다 ‘아재, 물은 어떻게 해잡수요’라고 물어본 적이 있지. 우리야 웃마을 아랫 마을 전부 우물이 하나씩 있으니까 물을 길러다 먹고 그랬지만 뻘등마을은 바 닷가랑 붙어 있으니까”라며 “아니나 다 를까 지하수를 파는 곳곳마다 해수가 올 라와서 물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더라 고. 그래서 내가 동사무소를 한참 쫓아 다녔지. 뭐 알아달라고 한 일이 아니었 지만 결국 뻘등마을에는 상수도가 들어 오게 됐어”라고 말했다.

현재도 종종 쓰인다는 보기드문 우물

당시의 우여곡 절이 많았던 듯 했으나 서 통장은 그러 한 어려움에 대해서는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서 통장은 또한 비슷한 시기에 웃마을 에 주차장도 조성할 수 있도록 예정된 토지에 있던 조경수를 직접 파서 옮기는 등의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웃 마을은 농사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싣고 오는 차가 돌아나가는 곳이 없어, 늘 큰 길가에 물건들을 내리고 주민들이 들어날랐어야 했으나 주차장이 조성된 이후 로 이러한 불편은 없어졌다.

서 통장은 “그동안 정말 오랜 기간 마 을 일을 해왔지만 힘들었던 적은 없었어, 남은 기간 동안 그저 우리 황길 일대 가 잘 개발될 수 있도록 주민들과 시 사 이의 중간자 역할이나 잘 해야지 뭐”라 며 올해 말까지 남은 임기에 대한 다짐 을 보였다. 마을을 나서며 우물가 옆 텃밭에서 퇴 비를 뿌리는 노부부를 만났다. 부부는 퇴비를 뿌려 밭을 꾸린 후 감자를 심을 생각이다. 어린 시절 자주 부르던 노래 처럼 감자에 싹이 나고 잎이 날 무렵에 는 겨울 내내 움츠렸던 마을은 다시 활 기를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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