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한낮인데도 바깥은 여전히 추위가 맴돌고 있었다. 세상은 회색으로 말라있고 차가운 바람은 날 뛰는 망나니처럼 앞마당과 계곡과 산을 휘젓고 다니며 산촌의 집집마다 대문을 꼭꼭 걸어 잠그 게 했다.

단조로운 겨울의 음울하고 답답한 기분 을 떨치려 어디든 나서고 싶지만 그때마다 추위 가 나의 발목을 잡았다. 친구들은 내가 따뜻한 남쪽나라에 산다며 겨울 이 춥지 않아서 좋겠다고 부러워하지만 올 해 추 위는 유난히 꼬리가 길고 끈질겼다.

하긴 서울이 요즘 며칠 동안 계속 영하 10도가 훨씬 넘는 추위 에 갇혀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나는 그동안 저 추운 북녘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2월에 접어들면서부터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고로쇠는 언제 나오느냐고 자주 물어왔다.

산 속 에서 지내다보니 읍내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내 얼굴만 보아도 깊은 산을 떠올리며 높은 산에 쌓 인 눈 소식을 묻고, 여름이면 계곡에 흐르는 수량 까지 인사말처럼 물어왔다. 또 어떤 이는 내 얼굴 을 살피며 짐짓 봉강의 물이 좋긴 좋은 모양이라 며 산과 더불어 사는 생활에 관심을 표하기도 했다. 추위가 천천히 밀려나면서 나무에서 흘러나온 물이 자연이 내린 고로쇠 약수였다.

나무들은 그 의 몸 안에 흐르는 피 같은 물까지도 내어주니 나무들이 일생동안 인간을 향해 베푸는 선행은 끝 없이 깊고 아름답다. 해마다 사람들은 한데모여 약수를 마시며 올 한 해도 건강하기를 주문을 외듯 다짐하곤 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고로쇠 소식을 묻는 것은 지금 쯤 봄이 어디쯤에 와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 음도 함께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무에서 고로쇠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추위를 뚫고 먼 길을 걸어야했고 높은 산을 부지런히 오 르내리는 과정을 되풀이해야했다. 그러는 사이 멀리 있던 봄은 나무가 물을 내밀듯 천천히 추위 를 밀어내며 우리 곁으로 다가오곤 했다.

이른 아침 산행을 떠나는 우리 일행은 온 몸을 동여매듯 여러 벌의 옷을 겹쳐 입었지만 산속의 추위는 여전히 매서웠다.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길 사이로 거센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 높이 뻗은 나무들이 서로에게 부딪히며 괴성을 지르고 휘청거렸다. 심술궂은 바람을 향해 이젠 제발 그대 로 내버려두라는 듯 저항하며 힘들어하는 모습이 었다.

마을을 출발한지 한 시간쯤 지나 제멋대로 갈라지고 뽀족한 바위를 건너고 경사가 심한 비 탈을 비틀거리며 오르다보니 숨은 턱밑까지 차오 르고 한 발씩 앞으로 옮기기가 고통스러웠다. 마음은 늘 내게 주어진 일을 놀이하듯 즐기며 편히 살고 싶지만 세상 일들은 매번 의도한 대로 따라와 주지 않았다.

그러나 겨울은 우리에게 가혹하리만큼 많은 시 련을 주었지만 그것을 극복하면 돌아오는 댓가가 제법 쏠쏠하기도 했다. 어느 분지에 이르자 수 백년 동안 노출되지 않 은 듯한 고목들이 고요하게 살아있었다. 그곳에 는 선 채로 죽어가는 나무들도 살아있는 듯 신비로웠다. 그들은 마치 몸 전체로 무너져 내릴 듯한 하늘을, 비와 바람을, 흘러가는 세월을 떠받치듯 튼튼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오랜 과거를 안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뜨거워지고 경외심이 일었다. 또 산을 누비다보면 곳곳에 이름 없이 생겨났다 가 사라진 절터들을 만나곤 했다. 그 때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세월이 거쳐간 흔 적들이 아스라했다.

허물어진 돌담이나 아직 물 이 흐르는 주변의 우물, 형체 없이 부서진 기와 파편들, 멀고 험한 길을 수행하듯 걸으며 매서운 추위를 안고 살았던 승려들의 꿈이란 무엇이었 을까 ? 바다 멀리 흘러내린 능선들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며 성불을 꿈꾸었던 것일까? 그들 이 그리는 세상은 어떤 곳이었는지 가끔 궁금해 지기도 했다. 원형을 그리듯 둥글게 돌을 쌓은 숯가마와 검 게 타버린 숯가루로 덮인 비탈도 보였다. 불을 피 워 숯을 생산하고 산에서 기거하며 지게에 메고 수십 리 길을 걸어야 닿았던 먼 길, 나는 어쩌다 빈 몸으로 걷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데 그들의 끝없는 노동을 생각하면 매 순간이 고행의 연속이었을 것 같다.

언덕길 고비마다 한 숨 을 토하던 그들마저도 바람에 쓸리듯 가버리고 그 들의 빈자리를 묵묵히 버티는 고목들만 겨울 산 속에서 의연했다. 그러나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일을 끝내고 집을 향하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특히 힘든 일을 끝냈을 때 내 어깨에 실리 는 충일감이 나를 당당한 존재로 일으켜주었다. 평소에도 답답할 때마다 산을 오르면 머리가 씻긴 듯 맑아지며 새로운 의욕이 일기도 했는데 산 속에는 분명 복잡한 마음을 정화시키고 사람 을 끌어당기는 인자가 분명 있는 듯했다.

집에 돌아오면 여전히 몸은 무겁고 다리는 아 프지만 내가 그 높은 산에 올랐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랍고 감사했다. 해마다 이맘때쯤 나는 먼 산을 오르면서 여러 차례 고통을 겪지만 용기 내어 다가가면 활력과 깨달음까지 덤으로 얻곤했다. 봄이 세상 속으로 스며드는 것도 그러 한 경로를 통한다. 오늘도 산 너머로 바람이 불고 있지만 세력은 분명 예전만 못하다. 도솔봉 아래로 흐르는 물소 리가 점차 크게 들려온다. “ 남녘땅 봄의 전선, 맑고 쾌청함, 오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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