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만한 물가

▲ 라종렬 광양사랑의교회 목사

“설 보름 다 지나면 머슴들이 썩은 사내끼(새끼줄)를 들고서 산으로 간다”는 속담이 있다. 긴긴 겨울을 지나며 지난해 추수한 곡식들도 여타 비축해 둔 것들이 진즉에 동이났지만서도 설과 보름은 그래도 먹을것 풍성하고 또 어래저래 잔치 같은 분위기에 머슴들은 큰일을 하지 않아 좋았다. 하지만 그런 호시절이 다 지나고 정월 보름이 지나면서부터는 이제 산과 들에 가서 초봄에 해야 할 농사일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특히나 농사를 짓는 이들에게 농한기가 끝나고 새싹이 돋는 이른 봄부터는 챙겨야 할 일들이 많아진다.

박경리씨는 <토지>에서 그런 2월을 이렇게 노래한다. “이월로 접어든 것이다. 땅에는 봄의 입김이 서리고 강기슭의 대숲이 한결 연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바람 올린 음식이 가만 가만 나누어지고 마을 사람들은 금년에도 시절이 잘되기를 빌었다”. 그런 시절들이 지나고 본격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데 봄볕에 놀기는 좋아도 일 하자니 싫고 그래서 차라리 산에가서 죽겠다고 하지만 정작 죽기는 싫어서 썩은 새끼줄을 들고 산에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다가 해야 할 농사일이 때를 놓치게 되면 한해 농사가 망쳐진다. 이래저래 빈궁함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면, 오래지 않아서 해야 할 일을 하느라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고 살아가게 된다. 초, 중, 고 대학을 들어가는 아이들이 새학년 새학기를 시작하는 시간들이 딱 이 계절이다. 봄과 새로움은 그래서 더더욱 우리 모두에게는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고 연두빛 새싹은 더더욱 새로운 시작과 깊은 연관이 있음이 우리도 모르게 어려서부터 배어 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시작의 초입부터 아이들이 의문을 갖는다. 왜 이렇게 무의미한 일들을 아득바득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다. 성인이 되어서 취업을 하고 세상을 살아가는데에 학원에서의 교과서를 갖고 공부하는 것과의 괴리가 너무 크다고 생각한다. 급기야 그런 공부가 세상 살아가는데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이런 생각은 결국 학교공부와 세상 공부는 다르다고 하는데까지 나간다.

과연 그럴까? 초등학문, 중등학문, 고등학문 그리고 그 가운데 함께 공동체로 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경험하면서 배우는 것들은 20대 이후에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극히 기초적인 것들이다. 교과서 뿐 아니라 다른 책들과 친구들의 사귐과 교제 가운데서 사회성을 길러감으로 말미암아 향후의 창조적 직업과 폭넓은 사고의 지경을 넓혀 준다. 하지만 이것들이 기초공부가 제대로 우루어지지 않는다면 모두다 요원할 뿐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쓸모없는 것들이 아니라 모든 배움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는 해야 할 공부와 이이 있다. 그 시기에 정말 해야 할 일을 안하고 자기 하고싶은 것만 하게 되면 머지 않아 해야 할 일을위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삶은 마지못해 사는 인생이 되고 어쩔수 없이 사는 인생이고, 끌려가는 인생일 수 밖에 없다.

현재의 우리는 우리가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의 결과이다, 즉 탁월함은 행동이 아니라 습관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어떤한 분야의 달인들을 보면 모두가 다 처음부터 그런 달인일 수 없다. 간혹 타고난 재능을 갖는 것에 대해 말하지만 그런 사람은 드물고 대부분 오랜 시간동안 아주 무의미한 것 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어느날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의 연마와 훈련을 거치지 않는다면 결코 탁월해 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이들로부터 모든 과정의 초등학문에 입문하는 이들은 이러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물론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어릴 적에는 마냥 하고 싶어하는 일만 하려고 하고 정작 해야 할 것들은 소홀해 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연륜과 현실 사이의 다툼은 늘상 가정과 여타의 장소에서 끊이지 않는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한다고 한다. 배웠으면, 또 깨달았다면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의 갈등과 여타 개혁의 여정에서는 불편한 것들과 피치 못할 일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일들이 두려워서 깨닫고 생각한 대로 살지 않고 현실과 타협하다 보면 어느새 내가 사는대로 그렇게 생각하고 합리화하면서 결국 변화와 성장이 아니라 도착과 왜곡의 길로 접어들 수 밖에 없게 된다. 우리네 삶의 모든 분야는 이와 같이 먼저 의무적으로 반드시 거치고 해야 할 과정이 있다. 지금 그런 과정의 초입에 있는 이들에게 내일을 위한 오늘의 연단과 훈련의 과정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성실하게 채워가야할 이유들을 소망가운데 전하면서 위로와 격려로 용기를 주고 응원해 줄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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