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희 칼럼

▲ 김광희 광양보건대학교 교수

해마다 봄은 섬진강변 다압의 능선과 골짜기를 타고 온다. 온 산야를 하얗게 뒤덮은 청매화 그늘 아래로 어린 쑥이 고개를 내밀고, 멀리 구례에서 노란 산수유 소식이 들리면 이제 그만 겨울을 벗어도 좋다. 수묵담채화 같던 겨울 풍광에 파스텔을 칠하듯 화사한 봄꽃이 수놓이면 아무리 무딘 사람이라도 움츠렸던 마음의 활개를 펴고 바야흐로 봄을 누릴 채비를 서두르게 된다. 봄은 이처럼 천지를 뒤바꾸어 살만한 세상, 볼만한 세상을 차려 놓는다. 마치 겨울에 얼어 죽지 않고 살아남은 모든 것들을 위해 베풀어지는 하늘의 축하잔치라도 되는 듯. 만약 천지간에 꽃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봄을 느끼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만큼 꽃은 봄의 상징이며 절정이다.

올해 봄은 유난스럽다. 꽃은 피었지만, 꽃봉우리 위로 눈이 쌓이는 춘분을 지내면서 꽃소식이 무색하도록 옷깃을 단속하게 되니 말이다. 왕소군(王昭君)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 당나라 시인 동방규(東方虯)의 시가 절로 생각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어(胡地無花草),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春來不似春),

옷에 맨 허리끈이 저절로 느슨해지니(自然衣帶緩), 가느다란 허리 몸매를 위함은 아니라네(非是爲腰身).”

이 시는 한(漢)나라 원제(元帝)가 자신의 사위가 되고자 하는 흉노족 호한야에게 공주 대신 궁녀 왕소군을 보내면서 일어나는 상황을 두고 동방규가 쓴 시이다. 흉노의 땅에 공주를 대신하여 끌려간 왕소군은 마음에 억울함을 품고 고향을 그리워하며 야위어 갔다. 오랑캐 남자들은 왕소군의 가는 허리를 보면서 그 미모에 감탄하였겠지만 그녀는 고향을 떠난 한스러움에 근심하다 몸이 야위어 허리띠가 느슨해질 정도가 되었다. 그녀에게 다시 찾아온 봄인들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봄볕 따스한 대학 캠퍼스에 청순한 사람 꽃이 피어났다.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화사한 얼굴빛의 대학 새내기들이 교정에 가득하다. 깔깔 대며 웃는 소리와 친구들과 어울려 쏟아내는 재잘거림이 정겹기만 하다. 이 아름다운 대학의 봄날에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핑 도는 것은 이 청춘들의 웃음과 가벼운 발걸음을 오래도록 지켜줄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오기 때문이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문을 닫을 것이라는 위태로운 전망이 귀에 들린다. 학령인구가 너무 빠르고 가파르게 줄어들고 있다. 학생보다 대학의 정원이 더 많은 상황이 시작되었고, 서울과 수도권에 집중된 대학들 때문에 지방의 작은 대학들은 이제 문을 닫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우리 지역 대학들은 객관적인 교육 여건의 악화와 더불어 대학 경영진의 비리로 인한 대학 기능의 마비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과거의 비리에 발목이 잡혀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다.

대학의 폐쇄로 인한 지역의 황폐화 현상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남원시의 경우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연일 언론에서 걱정스런 보도를 쏟아내고 있지만 폐쇄가 이루어지고 난 이후에는 뾰족한 수가 없다. 우리 지역에도 이런 우려스러운 상황이 현실이 되지 말란 법이 없다. 어쩌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 모른다.

여기에서 조심스럽게 떠오르는 한 가지 생각이 있다. 부실기업에 대해 법정관리제도가 있듯이 한계대학에 대해서도 법정관리제도와 같은 공적 관리 제도가 도입될 수 있다면 학생과 대학 구성원, 그리고 지역사회가 겪어야 할 고통과 충격을 상당 부분 완화시키며 연착륙할 수 있는 길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 임시이사를 파견하는 미봉책에 머물 것이 아니라 지역의 국립대학이나 도립대학이 한계대학을 통폐합하거나 공적관리 주체를 지정하여 대학을 회생시킬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주는 것이 최선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전적으로 교육당국과 정치권의 의지와 노력에 달린 문제다.

캠퍼스에 피어나는 봄꽃을 보면서 깊은 상념에 잠긴다. 대학이 지역사회에 꽃으로 피어날 수는 없을까. 밝고 명랑한 청춘들이 지역 곳곳에 활력을 불어넣는 희망의 나무가 되어줄 수는 없을까. 봄볕 화려한 이 아름다운 정원에 거름 주고 물 주어 활기를 되찾게 할 진정한 리더는 없을까. 봄 정원에 불어 닥치는 꽃샘추위를 막아줄 울타리는 정녕 없는가. 광양이 쇠만 나오고 인재는 기를 수 없는 오랑캐 땅처럼 변해버린다면 햇빛 좋은 빛고을이 무슨 소용이며, 마로와 희양의 빛나는 자취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역 대학이 맞이하는 2018년 봄은 그래서 ‘춘래불사춘’이다.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