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태의 시대를 지나 콤바인 ‘격세지감’

참 농사짓기 편해졌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땅을 앞에 두고 허리가 휘는 농민들은 싸대기라도 한 대 갈기고 싶어질지 모르겠다. 농사가 평생 업이었던 어머니조차 화를 낼 일이다. 그러나 평생 농사꾼으로 살았던 부모를 둔 탓에 농사를 다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하여 농사짓는 일의 고단함을 아예 모르지는 않는다. 그 정도 청맹과니는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소로 논을 갈고 품앗이로 모를 내던 시절, 호미로 밭을 매고 괭이로 땅을 파던 시절을 겪어온 터라 기계화 된 지금의 농사일이 예전에 비하면 그나마 편해졌다는 뜻이다. 발 한 번 논에 들어가지 않고 이양기로 모를 내고 콤바인으로 벼 타작을 하는 시대를 살면서 비록 많은 세월을 살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격세지감이라는 말을 절로 떠올리는 것이다.

탁자 위에 놓인 사진은 그 고단한 농사일의 상징처럼 느껴진다. 바로 홀태라는 물건이다. 낫으로 하나하나 벼를 베어 수확을 끝내고 나면 다음 차례가 벼훑기였다. 길고 두툼한 각목의 앞·뒤쪽에 네 개의 다리를 달아 가위다리 모양으로 떠받치게 하고, 빗살처럼 날이 촘촘한 쇠틀을 몸에 끼웠다.

날과 날 사이에 볏대를 넣고 훑어내면 나락이 떨어진다. 하루에 벼 여섯 가마 정도를 떨어낼 정도로 작업 속도가 나지 않아 몇날 며칠 마른 가을햇볕 아래서 땀을 비 오듯 흘려야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산비탈 다랭이논을 가졌던 젊은 아버지는 벼를 베어놓고 한 삼일 말리고 난 뒤 이 홀태를 메고 논으로 향했다. 큰 형님과 작은 형님은 일꾼으로, 심심했던 어린 막내는 마실 가는 기분으로 따라가면 그것이 악전고투의 시작이었다.

형님들이 논에 펼쳐놓은 말린 벼를 차곡차곡 쌓아놓고 아버지에게 건네주면 아버지는 한웅큼씩 벼를 쥐어 홀태에 얹고 나락을 털어냈다. 날과 날 사이에서 나락이 우수수 떨어졌다.

수확한 나락은 가마니에 담아 지게에 매고 가파른 다랭이논을 다시 내려와야 했다. 그나마 평평한 논길을 만난 뒤에 소가 끄는 구루마에 싣고 올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그렇게 나락을 옮겨 시골집 창고에 쌓아둔 뒤에야 비로소 한시름 벗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수확한 곡식은 귀했다. 어디 소중한 게 나락뿐일까. 볏짚 또한 귀했다. 다랭이논에서 사람보다 더 수고한 누렁소를 위해 비축해야할 여물, 바로 겨울철을 날 식량이었음이다.

세월이 흘러 홀태가 물러간 자리에 발로 밟아 동력을 일으키던 기계홀태가 지나가고 경운기에 탈곡기를 연결해 쓰던 시절이 다시금 떠나가고 콤바인이란 물건이 가을철이면 온 들녘을 누비는 시절이다.

수많은 땀방울과 인내의 시간을 요구하던 시절이 가고 30분이면 뚝딱 간척지 한 구간의 배꼽을 드러내게 하고 마는 시절이 왔으니 하수상한 시절이 흘러 농사짓기 참 편한 세상임을 읊조린 것이다. 하여 너무 책망할 일은 아니라는 말이란 게다.

한편 해동농서(海東農書)에서는 홀태를 그네로, 농정촬요(農政撮要)에서는 도발(稻拔)이라 불렀다.

이것은 지역에 따라 인천으로 편입된 강화의 덕적도에서는 기네와 베홀깨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충청북도 제천지방에선 훌챙이나 치개로 불리웠다. 경상북도에선 호리깨, 충청남도에선 첨지, 전라남도에서 홀태라는 이름을 가졌으니 모양과 쓰임은 같았으나 사뭇 다양한 이름을 지닌 물건이기도 하다. 홀태는 통이 좁은 물건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한데 홀태바지, 홀태버선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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