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 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나무들로 둘러싸인 우리집 뜰은 나에게 종종 창작활동의 곳간 역할을 한다. 머릿속에만 머물러있던 일들이 어느 날 쏟아 지는 햇볕이 유난히 밝을 때, 혹은 엷은 이슬비가 촉촉하게 내릴 때 느닷없이 나를 채근하며 이곳 저곳으로 끌고 다닌다.

가령 잡초 우거진 산비탈에 꽃나무를 심거나 연못에 가라앉은 지난 해의 낙엽을 건져내거나 굴러다니는 돌을 모아 아담한 돌담을 쌓거나 흐름이 정지된 실개천에 시원하게 물을 흐르게 하는 등의 일들이 내 앞에 줄지어 선다.

그러한 일들은 함께하고 싶어 어릴 적 어두운 골목길에서 나를 손꼽아 기다리는 친구를 만나듯 반갑고 즐겁다. 그렇게 시작한 일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으며 내 몸에 있는 모든 에너지를 다소진시켜야 직성이 풀리곤 한다.

어떤 때에는 그날 못다 끝낸 일 때문에 한 밤중 에도 더디게 오는 다음날 아침을 기다리며 답답 해하곤 했다. 그런 일은 가끔 내 힘에 버거울 때도 있지만 실은 힘든 줄 모르게 지나가곤 한다. 내가 보내는 가장 즐겁고 보람된 시간은 바로 그런 일을 할 때이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고 버려진 듯한 것들을한 곳에 모으고 제자리를 찾아주다 보면 그들은 이내 주변과 어울리며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양자연스럽게 살아간다.

그래서 요즘은 내 주위의 반듯한 풍경보다는 음지에 버려진 것들에 눈길이 더 간다. 무의미하게 방치된 것들을 정리하는 일이란 곧 묻혀있는 아름다움을 캐는 일이기도하고 둔감해진 사람들의 감성을 일깨우는 일이기도하다.

그런 과정을 통해 인간과 자연은 서로 막힌 숨통을 트이게 되고 점차 밀접해진다. 내가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의 흐릿한 영혼이 밝아지고 정화되 어가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둘러보면 세상에는 제자리를 잡지 못해 쓸모없이 버려지거나 실제 가치보다 소홀하게 대접을 받는 것들이 참 많다.

요즘 집안에서의 나의 존재 가치는 미적지근한 편이지만 그런 일을 하는 순간만큼은 꽤 쓸만하 다는 평가를 받게 되어 조금 힘이 나곤 한다. 그래서 틈만 나면 어디에서 무엇을 옮기고 무엇을 심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몇 해 전 펜션이 있는 뒷산에 남천을 수십여 그루를 심었다. 따뜻한 남쪽 하늘을 배경으로 잘 자란다하여 남쪽 하늘이란 아름다운 이름을 지닌 남천은 여름엔 무성한 푸른 잎으로 가을에는 잎과 열매까지 빨갛게 무리지어 뽐내듯 서있는 풍경이 좋았다.

심지어는 대부분의 나무들이 잎을 떨군 겨울에도 오래 남아서 삭막한 계절의 풍경을 볼거리로 만들어주는 나에겐 퍽 고마운 울타리였다. 특히 풍성하게 맺은 빨간 열매들은 새들이 좋아하는 먹이라서 새들은 수시로 날아와 지저귀곤 했다.

처음 남천을 심었을 때 그들은 내가 기대하고 의도했던 대로 잘 자라서 그를 바라보는 손님들도 나도 흡족하게 해주었다. 그런데 한 두 해가 지나자 나무들이 잎을 내미는 것에 인색했고 심지어는 풍성한 열매조차 맺지 못했다. 그러다가 서서히 말라 죽어가곤 했다.

원인은 비탈진 언덕에서 내려오는 물 때문이었다. 작은 암반 사이로 조금씩 흘러나오는 물은 그를 담아줄 곳이 없자 남천 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스미어 나무들은 천천히 뿌리가 썩어갔다.

나무 주위를 걸을 때마다 땅이 질퍽거린 이유를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물이 흘러나오는 주변부터 흙을 파기 시작했다. 여러 날에 걸쳐 젖어있는 흙과 단단한 돌을 들어내니 생각지 않게 꽤 넓은 공간의 물이 담긴 연못을 얻을 수 있었다.

그동안 쉬지 않고 조금씩 남천나무들에게로 흘러내리던 물은 연못에 모였고 연못이 가득차면 흘러갈 새로운 길을 내어주니 물은 자연스럽게 낮은 곳으로 흘러갔다.

다행히 새롭게 흘러오는 물이 조금씩 고인 물을 밀어내어 연못은 항상 깨끗했다. 물은 새로 난 길로 흘렀고 뽀송뽀송해진 흙을 만난 남천들은 겨울이면 빨갛게 물든 잎과 열매를 선물하며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얼마 전에는 연 못 가운데가 허전해서 곳곳에 수련과 어리연을 심었다. 연못 주변에는 앞뜰에서 가지치기를 하면서 생겨난 목수국, 산수국, 죽단화, 개나리, 홍가시나무 등도 골로루 심었다.

마치 작은 공원을 만들기라도 하듯 그 주변은 나의 욕심에 비례해서 넓어졌고 많은 나무들이 들어섰다. 세상 만물을 움트게 한다는 봄이었기에 뿌리 없이도 그들을 키워낼 땅의 힘을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 모두 내 바램대로 살아준다면 내가 자랑할 만한 터전이 될 것이란 기대감도 솟아났다. 며칠 전 연못에 들렀더니 놀랍게도 알에서 부화한 수많은 올챙이들이 마치 제 집인 양 유유히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잔잔한 물을 만난 그들 세상에도 따뜻한 봄이 가득했다.

개구리들은 어떻게 알고 이 연못으로 찾아와 알을 낳았을까 ? 새로운 공간이 생기면 새 생명들이 생겨나고 다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올챙이들이 휘젓고 다니는 물속은 마치 작은 우주와도 같았다.

마르지 않는 물속에는 연못 밖에 서있는 단풍 나무 가지들도 구름을 떠안은 하늘도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풀잎들도 있었다. 그 속에는 지금까지 난무하던 이야기들과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들도 담겨 있었다. 어쩌면 아주 작은 내가 때론 방황하며 세월을 견디며 살고 있는 모습도 보이는 듯했다.

돌이켜보면 산 속 깊은 마을에서 내가 하나씩 만들어가는 일도 공간도 잃어버린 나의 자리를 찾는 긴 작업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 시간의 흐름, 삶에 얽킨 이야기들은 결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잠시 잊혀져 있다가 돌아와 빈자리를 메우고 다시 시작된다. 나의 일상도 그들 속에서 푸르거나 반짝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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