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죽은 게 아니라 우리 곁을 떠나갔을 뿐이다. 한때 머물던 육체를 떠나 자신의 틀에 알맞은 새로운 몸을 갖기 위해 다른 곳으로 떠난 것이다. 이 몸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이 몸을 지닌 것이므로 이 몸이 제 할 일을 다 했을 때 낡은 옷을 벗어버리듯 한쪽에 벗어 놓는다. 그는 때가 되면 어디선가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친지가 우리 곁을 떠나고 나면 평소 그의 모습과 무게가 새롭게 떠오른다. 그대는 지금 어느 곳에 있는가” 정채봉이 세상을 뜨자 오래도록 그와 함께 정겨웠던 법정스님이 남긴 육필원고의 내용입니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정채봉과 법정의 인연은 참으로 곱고 깊었다지요. 그 인연 가운데 먼저 세상을 버린 이는 나이가 한참 아래인 정채봉이었고 그를 보낸 법정은 솟구치는 그리움과 슬픔을 꾹꾹 눌러 앉히고 이처럼 차분한 글밥을 차려냈던 겁니다.

정채봉과 법정의 인연은 법정이 글을 연재하던 월간 샘터에 정채봉이 입사한 직후인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정채봉과 해남에서 태어난 법정 역시 할머니 손에 컸기 때문에 어릴 적 같은 기억을 공유하고 있었는데요, 아무래도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글의 풍모가 비슷하 였던 탓에 이후 25년이라는 세월 동안 가시버시 보다 더한 정분을 나누고 살았다고 전해옵니다.


정채봉이 암이 깊어 병실에 입원을 하자 그를 자주 찾아 위로하던 이도 법정이었는데요,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법정은 위 육필원고 말미에 “불쑥 들어선 나를 보고 더 못 뵐 줄 알았더니 다시 뵙게 됐다면서 아주 반가와 했다. 그날 병실을 나오면서 나는 그를 안아주었다.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살아서 다시 만날 날이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였다”고 썼습니다.

법정의 예감대로 정채봉은 며칠 되지 않아 세상을 마감했습니다. 겨울 한파가 기승을 부리던 2001년 1월 9일의 일이 었지요.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분에 ‘꽃다발’이 당선돼 문단에 나온 정채봉은 이후 대표작으로 꼽히는 오세암을 비롯해 작품을 내놓을 때마다 평단의 찬사와 함께 국민 모두가 사랑하는 동화작가가 됐지요.

동화도 동화지만 사상의 편린들이 담긴 수필 역시 법정스님과 함께 국민의 사랑을 오래도록 받고 있습니다.

잠깐 샛길로 접어들지요. 정채봉과 광양의 인연을 좀 살펴볼까 싶어섭니다. 1949년 순천 해룡 신성리에서 태어난 정채봉은 아주 어릴 적부터 광양읍사무소 (현 광양역사문화관) 뒤편에 둥지를 틀고 살았던 할머니 손에서 자랐습니다.

동삭교라 불리던 광양동국민학교와 광양중 학교, 그리고 광양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진학을 위해 터를 옮길 때까지 광양을 떠난 적이 없으니 그를 키운 것은 광양땅과 광양사람이라고 해도 누구 하나 시비를 걸지 못할 일이지요.

정채봉도 광양땅에 남긴 추억을 평생 잊지 않고 광양사람임을 자랑스러워하며 살았다고 전해옵니다. 그가 남긴 많은 글에는 광양에 대한 애정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요, 특히 ‘우리읍내’라는 제목의 수필을 통해 그 일단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매화와 안개와 보리와 은어와 동백이 어김없이 사계 따라 찾아오는 작은 읍내. 읍사무소도, 공회당도, 향교의 담처럼 흙속에 짚을 다문다문 넣어 만든 흙벽돌로 둘러싸인 곳.

비행기를 낚겠다고 간짓대를 들고 서산마를 오르내리던 영덕이, 여름이면 콩밭에 이슬이 무던히도 내리고 가을이면 새로 인 노오란 초가지붕마다 새하얀 서리가 잦던 우리읍내” 이제 법정도 세상과의 인연을 마감했지요. 지난 2010년 3월의 일입니다. 종교를 갖고 있지 않지만 생의 뒤안길이란 게 있다면 ‘이들에겐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 생에선 너의 가족이 돼 주겠다” 고 했다던 법정 그리고 정채봉, 생이 끝난 뒤편에서도 이들의 아름다운 인연이 오래 도록 이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 들 수없으니 말입니다. 좋은 인연이 머물다간 자리가 오래도록 향기로운 날입니다.

<사진출처 : 광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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