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을 걸으며

▲ 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창밖에 우거진 나무들이 바람에 넘실거린다. 뿌리와 줄기가 견고해지니 푸른 잎들은 바람에 몸을 맡기듯 자유롭다.

그들은 지난해보다 더 자랐고 넓은 곳까지 가지를 펼쳤다. 사철 푸르던 왕가시 나뭇잎은 새로 돋아난 잎에게 자리를 내주고 허물을 벗듯 천천히 떨어진다.

단풍잎에 숨어 있던 부메랑 같은 붉은 꽃씨들도 바람에 휘돌아 내린다. 그러나 새 잎을 품지 못한 가지들은 마른채 쓰러져있다.

연초록 새순에 자리를 내어준 잎들, 단풍잎 뒤로 남모르게 지는 꽃씨들, 같은 나무에서 나고도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 잔가지들, 그들은 소리 없이 사라지지만 줄곧 나무의 성장을 위해 힘 쓰온 터라 결코 무의미한 삶이 아닌 듯하다.

자연 속에서 나무들의 존재감이 빛나는 것은 그늘진 곳에 그들의 삶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하다.

이른 아침 홀로 깨어나 빗자루로 떨어져 내린 그들을 쓸었다. 마당을 쓴다는 것은 쓸모없어진 것들을 치우는 일이지만 쓸다보면 내 안에서 복잡하게 헝클어 졌던 여러 일들까지 명료하게 정리되곤 한다.

그래서 아침에 마당을 쓰는 일은 처져있던 마음을 바로 잡는 일처럼 차분하고 경건 해진다. 이 또한 주변에 숲을 이룬 나무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야외 테이블에는 어젯밤 유쾌했던 시간의 흔적들도 곳곳에 남아있었다. 멀리 서울에서 몇몇 손님들이 펜션을 찾아왔고 그들의 넘치는 찬사를 받았던 우리집의 나이 든 나무들은 모처럼 활기를 띠었다.

그들은 며칠 연휴를 이용해 먼 남쪽 여행을 계획했지만 놀랍게도 꼬박 10시간이 넘어서야 도착했다.

그것은 다가가면 멀어지는 도시와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원초적인 거리, 결코 좁혀지지 않는 엄연한 간격처럼 여겨졌다. 차문이 열리고 굽어진 허리를 펴는 그들 입에서 아구구 !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 먼 곳까지 찾아오기 위해 그들이 겪은 지루함과 수고가 내 탓인 듯 미안하고 안타 까웠다. 그러나 나는 곧 그 미안함에서 벗어날 수있었다.

그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울창한 나무들과 느닷없이 쏟아지는 계곡의 물소리를 듣고 방금 소나기를 만난 풀잎처럼 생기가 돌았다.

처음 만난 풍경인데도 낮설지 않고 마음을 활짝 열듯 반겨주는 깨끗한 풀내음과 물소리가 그들을 설레게 했다.

“ 와! 이건 전혀 다른 세상에 온 느낌이에요”그들은 주변을 천천히 걷다가 멈춰서고 다시 둘러보기를 반복했다. “ 여보, 여기도 와 봐 !”

목소리만으로도 그들의 들뜬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한밤중에도 잠에서 깨어 문을 열어보면 그들은 시간을 잊은 채 여전히 테이블에서 얘기꽃을 피웠고 수시로 물가에 나가 발을 담그곤 했다.

그들은 마치 손꼽아 기다리던 고향에 돌아온듯 했다. 나는 고등학교를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에서 다녔다.

동해 바다에서 자란 나에게 서울 생활이란 어울리지 않았고 그래서 더욱 힘들었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어 고향생각으로 가득했던 내가 가장 손꼽아 기다린 것은 방학이었다.

방학하는 날이면 나는 날개를 달고 한달음에 고향을 향했다. 그 곳에는 내 인생의 반짝이는 부표처럼 떠있는 작은 포구의 고향과 어머니가 있었다.

먼 길을 달려 집에 돌아와 지친 듯 툇마루에 몸을 기대면 들려오는 파도소리와 뒤란에서 흔들리던 대나무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그들에게는 낮익음과 약간의 낮설음, 따뜻함, 평화. 자유로움 등 도시에서 메마르고 지워졌던 것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것들은 장시간 여행의 나른함과 섞이며 나를 깊은 잠 속으로 끌고 갔다. 자다가도 언뜻 언뜻 깨어 방을 둘러보곤 했는데 그 때마다 고향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다시 깊은 잠에 빠지곤 했다. 아마도 꼬박 하루를 달콤한 잠 속에 있었던 것 같다.

내 영혼의 뿌리가 손짓하는 고향과 가슴의 상처인 양 나를 아파했던 어머니가 계신다는 것은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지곤 했다. 고향을 떠나 살고 있지만 자연의 푸른 숲을 바라보며 내 고향인 양 살아가고 있다.

내가 심었던 나무들과 꽃들이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어떤 감흥을 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숲이 우거지면 찾아오는 새들의 가벼운 날개짓처럼 수시로 다가와 충분한 휴식을 누렸으면 한다.

내가 요즘 심는 꽃과 나무 하나 하나가 지금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언젠가 뿌리가 깊어지고 푸르게 잎을 내밀면 그들이 함께 어우러져 숲이 되고 지친 사람들에게 충분한 위로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한 일은 지금도 내주위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하며 일상에서 소홀 할 수 없는 가치이기도 하다.

세상의 큰 역사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 것임을 감안하면 매 순간 접하는 일과 생각들이 결코 사소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이 되고 든든한 바탕이 되고 있음을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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