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젊었던 고모부는 힘차게 페달을 밟아 좁은 골목길을 빠져 나갑니다. 어둠이 막 몸의 무게를 흘려 놓기 시작한 저녁의 초입 무렵이지요.

바람이 좁은 골목길 여기저기를 맴돌고 골목길에는 찢어지고 빛바랜 영화포스터가 바람에 살랑됩니다.

젊은 고모부의 모습은 이제 골목의 끝에 어렸다가 이내 사라집니다. 고모부의 자전거도 사라집니다.

180cm를 훌쩍 넘긴 큰 키에 황소만한 덩치를 가진 고모부는 어린 사내아이에게는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습니다.

손이 크고 호탕해서 늘 조카들에게 쉽게 지갑을 열었고 항상 두 손에는 배가 잔뜩 부른 과자봉지가 들려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당시 두 달 정도 작은 고모네 막내누나와 6 살배기 사내아이는 큰 고모네에 맡겨졌는데요, 왜 큰 고모네에 머물게 된 것인지 도통 기억에 남아있지 않지만 해지는 저녁 무렵이면 큰 고모가 운영하는 과일가게 앞 평상에 앉아 누이와 사내아이는 울적한 마음을 가슴에 품은 채 눈물을 매달기 마련이었지요. 아직 엄마 품이 그리운 어린 아이였던 게지요.

부모와 떨어진 두 아이는 그렇게 평상 위에 앉아 어둠이 점점 짙어지는 골목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지요.

큰 고모가 따스한 방에 들어가 TV를 보고 있으면 맛있는 저녁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지만 처음엔 무척 신기했던 TV는 곧 시들해졌습니다.

채널이 2개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어린이들이 볼만한 게 별로 없기도 했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얼마나 흘렀을까요.

어느 순간 젊은 고모부의 자전거가 돌아오는 소리가 짜르릉 하고 울립니다. 몸을 비운 자전거는 가볍게 골목길을 내달려 우리 앞에 곧 멈추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젊은 고모부는 커다란 자전거에서 내려 짐칸에서 짐 대신 꽈배기 등을 담은 과자봉지를 우리에게 내밀 었지요.

고모부는 석유장사를 했지요. 여러 가지 사업에 손을 댔다가 일이 잘 풀리지 않았던 고모부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게 바로 석유장사였습니다.

짐자전거에 하얀 석유 통에 등유나 경유 따위를 싣고 상가 곳곳을 돌며 배달을 하는 일이었지요.

당시 주택가에는 연탄을 쓰는 데가 많아 석유의 쓰임새가 많지 않았지만 제법 사는 집에는 석유보일러가 힘을 냈고 대부분 상가에선 석유난로를 태워 매섭게 한기를 뿜어대는한 겨울을 버티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디서 어원하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젊은 고모부는 당신의 자전거는 ‘은판 시아’라고 불렀습니다. 몸집이 아주 커다란 자전거였습니다.

어느 지역에서는 짐차라고도 불리었다는 이 짐자전거는 몸체도 제법 알찼지만 무엇보다 자전거 짐칸부분이 일반 자전거에 비할 것이 못되었 지요. 커다란 석유통 세 개쯤은 거뜬히 싣고 다닐 정도 있으니 말입니다.

짐칸 부분은 개조해 더 많은 짐을 싣기도 했는데요, 의자와 짐칸 사이에 철봉을 용접으로 붙여 물건을 높게 쌓는데 용이 하도록 하거나 철판을 깔아 짐칸면적을 넓히고 더 많은 짐을 실을 수 있도록 했던 게지요.

고모는 조그만 과일가게를 하며 석유배달 전화를 받고 장부에 주소와 석유배달량을 가게 문 바로 안쪽에 걸어두면 고모부는 가게에 들러 주문을 확인하고 그렇게 골목골목을 돌며 석유배달을 했던 겝니다.

고모부에게 석유장사는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질 마지막 보류였고 짐자전거는 고모네 가족의 생계와 고모부의 청춘을 살려낼 마지막 희망과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늘길에 오르신지 오래된 고모부를 떠올리게 만드는 사진 한 장이 눈앞에 있네요. 그러했겠지요. 이 짐자 전거는 여름철 골목길을 돌며 아이스케끼를 팔던 빙과아저씨에게도 생계였겠지요.

골목골목 울려 퍼지던 빙과아저씨의 울음도 함께 실려 있겠지요. 단지 추억일 뿐인이 사진 한 장엔 삶이 신산스러웠던 그때의 아픔도 고스란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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