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예로부터 흥이 많은 민족이라고 했던가요. 한 잔 술이 들어가면 어김없이 음주가무가 함께 어화둥둥 펼쳐지는 민족이니 달리 뭐라 일컫겠습니까. 여기와 별반 어울릴 것 같지는 않지만 한민족의 흥을 가장 극대치까지 끌어올린 인물은 아이러니하게도 폭군으로 악명을 떨친 연산을 들 수 있겠습니다.

연산군은 조선 팔도에 채홍사를 파견해 아름다운 처녀와 건강한 말을 뽑고 흥청을 만들어 관리했다고 전해옵니다. 그 뿐이었겠습니까. 왕가의 흥복을 빌던 사찰인 원각사를 폐지한 뒤 기생양성소로 만들었고 더나가 오늘날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성균관도 유생들을 쫓아내고 아예 유흥장으로 만들어 버렸지요.

벼슬아치나 선비들로 하여금 흥청들을 태운 가마를 메게 했으니 천지가 뒤바뀐다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도 마다 않고 밤낮을 가리지 않으면서 어여쁜 흥청들과 즐김에 쉼이 없었지요. 자신이 말이 되어 흥청들을 태우고 기어 다니거나 반대로 자기가 그녀들 등에 올라 타 말놀이하는 기행도 서슴없었습니다. 결국 중종반정이 일어나 왕좌에서 쫓겨나고 목숨을 잃었습니다만 그 시절 악사와 춤이 널리 발전하였다하니 아이러니라 할 밖에요. 물론 백성들은 연산이 흥청들과 놀아나다 망한 것을 두고 ‘흥청망청’이라는 말로 연산치하의 고통을 곱씹어 조롱했지만 말입니다.

신윤복이 그린 <혜원전신첩>에 등장하는 양반들의 유흥놀이도 가만 살펴보면 우리민족이 얼마나 흥에 겨운 민족이었는지 한 눈에 살펴볼 수 있지요. 오죽하면 임금이 명한 금주령까지 어긴 채 기생을 옆에 끼고 풍악을 즐기는 속 빈 양반들의 모습이 해학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평소 혜원의 화풍답게 이 그림첩 속에는 남녀 쌍쌍으로 연회를 즐기는 양반에다 풍악에 맞춰 춤추는 양반은 물론 선상에서 풍류를 즐기는 양반의 모습이 혜원 특유의 장난기를 여기저기 숨긴 채 말입니다. 혜원의 그림에서 빠지지 않고 꼭 등장하는 것이 바로 장구나 북 등 흥을 돋기 위한 악기들입니다. 요즘도 한 민족의 흥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습니다. 비난 받을 구석이 많지만 봄가을 나들이에 나서기 위해 오른 관광버스에서조차 음주가무를 놓지 않고 찾아간 명승지에서도 정작 명승지 관람엔 관심조차 두지 않지요. 술판이 벌어지길 기다렸다가 가무에 흥겨우니 눈살이 잔뜩 찌푸려지는 것과는 별개로 흥 하나는 전 세계 어느 민족과 견주어도 맨 앞자리에 이름을 올릴만한 민족에 분명합니다.

1950년대 광양 땅을 둥지 삼아 살았던 이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물론 앞서 소개한 바와는 많이 다르지만 일상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나들이에도 풍류는 꼭 함께였던 모양이니 말이지요.

오늘 우리 곁에 놓인 사진은 1950년 어느 마을의 나들이 모습입니다. 한 상 가득 차려낸 채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갖는 촌로들의 얼굴에 즐거움이 가득 매달려 있지요.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에 띠는 것이 있을 텐데요, 바로 그렇습니다. 북이 숨은그림찾기 속 그림처럼 슬금슬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래도 한바탕 흥에 겹다가 지금은 박물관 전시실을 차지하고 있을 게 분명한 니놀타 카메라를 들이미니 어느 새 점잖게 자리를 찾아 앉아들 계시는데 아무렴요, 화무는 십일홍이요, 늙어지면 못 노는 법. 이 사람 저 사람,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가 낭자했을 게 분명했던 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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