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학 의병부대원 250명 광양과 조국 위해 희생

광양 출신 독립운동가 황병학(1876.1~1931.4)의병장의 손자인 황호부 전 감사원 감사관이 정현복 시장에게 △황병학 의병부대 공적선양 △망덕만 전투 전적지에 의병전투공적선양 홍보관 설치 △생쇠골 야철지 복원 △백일장장원 시비제작설치 △광양시민의 상을 황병학 의병장의 상으로 대체 등을 건의했다.

공직에서 은퇴 후 현재 진상면 비촌마을에서 생활하고 있는 황호부 전 감사관은 최근 정현복 시장에게 ‘황병학의병부대 공적선양민원’ 건의문을 전달했다.

황 전 감사관은 건의문에서 “황병학 의병장과 황병학 의병부대 의병 250명은 대부분 광양인으로 이들 전원은 한평생 자신이 태어난 광양과 조국을 위해서 신명을 바치고 희생됐다”며 “광양시가 덕망이 있는 사람들로 황병학 의병부대 공적선양사업 추진위원회를 설치해 선양사업을 선정 추진하는 것이 광양과 조국을 위해 억울하게 희생된 황병학 의병부대 의병 250명의 영혼에 대한 보답을 이룰 수 있다”고 밝혔다.

또 “황병학의병부대의 제1차 전투를 대승으로 이끈 망덕만 전투의 현장인 망덕포구엔 현재 그 공적을 알리는 조그마하고 초라한 안내판이 하나 설치되어 있다”며 “규모가 큰 ‘홍보관’과 ‘석판조각상’을 설치해 공적에 걸 맞는 선양과 함께 망덕포구가 황병학 의병부대의 전투대승전적지임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수백억 원의 예산을 들여서 다리를 만들고 전망대를 만들고 도로를 포장하는 것 보다 더 값지고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 광양이 낳은 독립운동가인 황병학장군의 위대한 삶을 기억하는 사업일 것”이라며 “광양시민의 상을 황병학 의병장의 상으로 대체될 수 있도록 노력해줄 것”을 당부했다.

황 전 감사관은 이밖에도 “지난해 9월 광양향교에서 열린 전국한시백일장에서 ‘의사 황병학 선생 추모’를 시제로 장원을 차지한 한정석의 시문을 장원시비로 제작해 널리 알림으로써 광양향교의 업적을 빛냄과 동시에 황병학 의사의 공적을 선양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와 함께 “황병학 의병부대가 백운산에서 의병전투에 사용하기 위해 칼과 창을 제작했던 야철지는 현재 △생쇠골 △내회계곡 △노점골 등 3곳으로 추정하고 있다”며 “이중 생쇠골 야철지가 황병학 의병부대의 주요무기제작소로 확인됐고 또한 현재 그 잔재가 뚜렷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생쇠골야철지를 복원할 필요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야철지가 복원된 곳은 전국 어디에도 없어 희소가치차원에서도 전국에서 하나뿐인 의병전투 무기를 제작한 야철지로서 각광을 받게 될 것이고, 광양에서의 의병활동을 우리나라 전 국민에게 홍보할 수 있는 장으로도 널리 활용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다.

▲ 생쇠골 야철지

황호부 전 감사관은 “황병학의병부대원 250명이 광양과 조국을 위해 희생되었는데, 이에 대한 보답으로 공적을 선양하는 사업을 하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가슴에 품고 살던 중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라 생각되어 건의문을 작성하게 됐다”며 “정현복 시장이 황병학의병부대 공적선양사업이 반드시 이루어 질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한다”고 밝혔다.

황병학 의사와 황병학 의병부대의 공적

190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조국은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조국의 백척간두의 상황에 분개한 황병학 의사는 전라도와 경상도에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화가 머리끝에까지 이르렀으니 이처럼 얼굴에 상처를 입고 살 바에야 차라리 원수를 갚고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는 격문을 사방에 붙이자 산포수 등 250명이 넘는 장정들이 호응하여 의병을 규합했다. 그리하여 1908년 음 7월 26일 광양을 둘러싸고 있는 영봉 백운산에 “호남창의대장기”를 꽂고 대일본제국에 맛서 투쟁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황병학의병부대의 제1차 전투는 망덕 거주 일본인 기습공격이었다. 일본인 어업자본가들이 광양 망덕포구로 이주해 와서 근대적인 어선과 어구들로 어장을 싹쓸이해감으로써 광양어민을 괴롭히고 있는 진하면 망덕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일본인선박과 일본인거주주택이 공격목표였다. 1908년 음 8월 5일(양 9월 1일) 새벽3시를 기하여 150명의 정예의병은 공격목표를 향해 기습작전을 벌려 6척의 일본인선박과 여섯 채의 일본인주택을 불태우고 일본인 10명을 사살했으며 일본인소유 10정의 양총을 획득하는 성과를 거뒀다.

황병학의병부대의 제2차 전투는 1908년 음 9월 초 옥곡원 후산 전투였다. 이동 중인 일본군과 옥곡원 후산에서 맛 붙은 치열한 전투에서 상당수 의병이 희생되었고 황병학 의사도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고 진상면 섬거리 최춘명의 집에서 치료를 받다가 억불봉 용신암 부대본부기지로 귀환해서 치료를 받아 완쾌했다.

황병학의병부대의 제3차 전투는 1909년 음 1월 광양헌병분견소 기습작전이었다. 망덕만 전투에서 입은 일본인의 피해를 보복하려고 광양읍에 새로이 설치된 광양헌병분견소를 야간에 기습 공격하는 작전이었다. 이 전투를 성공리에 끝내고 10정의 양총을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황병학의병부대의 제4차 전투는 1909년 음 7월 19일 묘도해상전이었다. 일본군은 경찰병력과 군병력을 증강하여 의병부대의 본부기지인 백운산을 강력히 압박해왔다. 더 이상 백운산에서의 전투 활동이 어려워지자 그 동안의 전투에서 많은 의병이 희생되고 남아있는 100명의 의병부대 전원이 여천군 삼일면 묘도로 이동 중 비밀이 누설되어 해상에서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져 절반의 의병이 희생되고 황병학 의사 등 의병 50명은 잠영으로 여천군 삼일면으로 탈출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 이로서 의병부대는 완전히 괴멸하기에 이르렀고 특히 영호남지방에서 의병활동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자 1909년 9월부터 일본군이 ‘남한대토벌작전’을 전개함에 따라 더 이상 의병활동은 어렵게 되어 살아남은 얼마 되지 않는 의병도 해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후 1918년 고흥인 기산도와 함께 ‘임시정부국민대회 전라도의무금모집단’을 조직하고 상해 임시정부 활동자금을 수집하여 임시정부로 보내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이 조직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모집단기밀을 포착하고 조직을 일망타진하는 수모를 당했다.

황병학의사는 1919년 기미삼일독립운동을 계기로 만주로 망명하여 용정, 영고탑, 흥개빈, 흑룡강 등지에서 독립군부대에 가담하여 독립활동을 전개하다가 1923년 상해임시정부의 비밀지령을 받고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서 국내에 잠입도중 의주에서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평양형무소에서 4년의 감옥살이를 하고 1927년 출옥해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1931년 4월 23일 영면했다.

정부는 황병학의사의 공적을 인정하고 1968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1977년 10월 26일 의사의 묘소를 광양군 진상면 비촌에서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했다. 1986년 9월 13일 광양향교와 광양유림은 광양향교부지에 ‘의사황병학기념비’를 건립했고 1998년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 공동으로 황병학 의사를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여 홍보물을 발간하고 독립기념관에 황의사의 공적을 전시하여 국민에게 널리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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