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광양역사 교과서

정유재란에 대해서 알고 있니?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 일본은 조선을 배제하고 화의교섭을 진행했는데, 1597년 1월 일본군이 14만 여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다시 조선을 침략한 것이 바로 정유재란이야. 앞서 ‘임진왜란과 광양’에 대해 살펴봤으니 지금부터는 정유재란과 광양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자.

일본군은 임진왜란 패전의 원인을 전라도 점령 실패라고 생각했대. 그래서 정유재란의 우선 목표는 ‘전라도부터 철저히 공략하자’였지. 일본군은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서 조선을 공격해왔는데, 이 때 우군은 함양과 진안을 지나 전주를 향해 북상했지.

그렇다면 좌군은? 사천과 하동을 거쳐 광양의 두치진에서 상륙한 수군과 합세해 구례와 남원으로 진격했지. 일본군은 전주에 집결한 후, 다시 나뉘어져 좌군은 남쪽으로 내려오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진했어. 그들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마을에 불을 지르는 등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지. 심지어 조선인의 귀나 코를 베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바치기도 했대. 참 잔인하지? 게다가 광양의 옥룡사를 비롯한 전라도의 수많은 문화유적이 불에 타서 사라지기도 했어. 참 안타까운 일이야.

한편 우군이 충청도에서 대패하자, 일본군은 더 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내려왔어. 이후 울산부터 순천에 이르기까지 남해안 30여 곳의 왜성을 중심으로 장기 주둔 거점을 마련했지.

일본의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는 1597년 9월 초부터 3개월 동안 광양에서 가까운 순천에 왜성을 쌓았어. 이것이 바로 순천왜성으로, 그 곳에서 1만4천의 일본군들이 주둔하였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일본군이 순천왜성을 거점으로 인근의 광양·순창·담양·화순 등지를 점령하여 노략질을 일삼는 한편, 현지 백성을 회유하여 포섭하는 양면 작전을 구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료도 있어.

조·명 연합군이 가만히 있었을까?
당연히 아니야. 조‧명 연합군 남쪽의 왜구를 섬멸하기 위해 육군과 수군이 합세하여 동시에 공격하는, 이른바 ‘사로병진(四路竝進)’ 작전을 수립했어. 이후 광양 전투를 통해 광양을 탈환하고 전라도 지역의 모든 일본군을 순천왜성으로 몰아넣었지. 광양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조‧명 연합군은 광양의 마로산성과 중흥산성, 그리고 순천의 검단산성을 거점으로 순천왜성에 장기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육지 진출을 봉쇄할 수 있었어. 특히 마로산성은 왜성이 있는 광양만이 환히 보이기 때문에 작전상 매우 유리한 곳이라고 하네.

마로산성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 짐작이 되니?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전쟁은 큰 변화를 겪게 돼. 남해안의 왜성을 거점으로 오랫동안 머물고 있을 것 같았던 일본군은 철수를 준비했고, 조‧명 연합군이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마지막 총공세를 펼치는 국면으로 전환되었지. 전남동부 지역에서 1598년 9월부터 11월까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과 조‧명 수륙연합군 사이에 정유재란 최대‧최후의 전투가 펼쳐졌지. 이 전투가 앞서 말했던 순천왜성 전투야. 이 전투는 광양에서 시작된 거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부터 순천왜성 전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육지에서는 순천 검단산성과 인근지역에서 주둔하고 있던 명의 제독 유정과 조선의 도원수 권율이 이끄는 군사들이 순천왜성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어. 그럼 바다에서는? 광양만 해상에서는 명의 도독인 진린과 조선의 수군통제사인 이순신이 이끈 연합수군이 일본군의 퇴로를 막고 해상전을 전개했어. 조‧명 연합수군과 일본군은 공방전을 벌이며 양측에서 모두 엄청난 희생자가 발생했지. 이를 광양만 해전이라고 해.

그러던 중 11월 19일 새벽, 일본군이 순천왜성에 갇힌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기 위해 광양만으로 진군해 왔어. 일본군의 이 작전을 조선군은 미리 알고 있었지. 조‧명 연합 수군은 관음포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일본군과 대혈전을 벌였어. 이것이 바로 광양만해전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이야.

그런데 노량 해전, 어디서 많이 들어본것 같지 않아?
바로 이순신 장군이 적의 조총 탄환에 맞아 전사한 해전이야.

이후 순천왜성에 갇혀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가 이끌던 군대는 마침내 여수 앞바다를 통해 탈출하게 돼. 일본군의 주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인데 그 끝은 참 초라하다, 그렇지? 일본군의 초반 공세와는 전혀 다르게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순천왜성에서 정신없이 도망친 것으로 임진왜란 7년전쟁은 마무리 돼.

전쟁의 이야기가 참 길지? 이러한 전쟁 때문에 사회 모습은 완전히 다르게 바뀌기도 해. 왜란 때문에 광양 지역민들은 얼마나 많은 피해를 입었을까? 특히 정유재란 때의 순천왜성 전투와 광양만 해전은 광양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기도 했지. 전쟁 막바지에 광양현은 독자적인 행정체제를 유지할 수없어서 순천도호부에 한때 병합되기도 했을 정도래. 마로산성에 올라가 순천왜성을 바라보며, 400년 전의 광양 사람들이 겪었던 전쟁의 아픔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 <광양제철고 미술동아리 'NOON'>

■ 더 알아보기

순천왜성에서 동남쪽으로 약 2km 거리엔 작은 섬이 하나 있어. 이 섬은 노루처럼 생겼다고 해서 장도(獐島), 즉 노루섬이라고 불러. 현재는 여수시 율촌면에 해당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광양현 골약면에 속했어.
정유재란 막바지 순천왜성 전투에서는 이 섬을 어느 편이 차지하느냐에 따라 전세가 좌우되었을 만큼 장도는 전략상 중요한 요새였어. 광양만 해전이 시작되기 전에는 일본군이 차지하고 병참기지로 이용했어. 하지만 조명연합수군이 이곳을 공격해 군량 3백여석을 빼앗고 조선인 포로 3백여 명을 되찾았지. 이어 조명 연합수군은 장도를 장악하고 해상으로 통하는 일본군의 퇴로를 막는 전진기지로 이용했어.

이후 순천왜성의 일본군은 수세에 몰려 탈출할 기회만을 엿보게 되었지. 그러나 광양만 해전은 결국 처절한 소모전으로 치닫고 말았어. 수세에 몰린 일본군이 수많은 사상자를 냈을 뿐만 아니라, 단 하루의 전투에서 명의전선 40척이 장도 앞바다에서 격침되고 전사자가 8백여 명에 이르렀지. 조선 측도 수군 지휘부의 많은 인사들이 희생되었어.

이처럼 장도는 광양만 해전의 격전지이었지만, 지금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전적비 하나 없어. 다만 일본군이 머물렀던 순천왜성만이 유적지로 단장되어 있지. 게다가 장도는 율촌공단 개발을 위해 바다를 매립하는 토석 채취장으로 사용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어.

시민과 학계가 장도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개발의 논리에 묻혀 결국 장도를 온전히 지켜내지 못했어. 현재 장도는 반쯤 잘려나간 처절한 모습으로 정유재란의 아픔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어. 순천왜성에 올라 장도를 바라보면 마치 반신불구가 된 노루를 보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파. 우리가 장도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저작권자 © 광양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