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 김세광 (하조나라 대표)

살다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문득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지금 왜 이곳에 있는 걸까?

이러한 의문들은 가령 내가 길을 걷는다거나 일을 하는 중에도 심지어는 잠을 자다가도 뜬금없이 떠올라서 나를 당혹케 하곤 한다.

처음 가본 곳인데도 낮설지 않고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발길이 닿는 곳,

딱히 무어라 답할 수 없지만 모르는 무엇인가가 혹은 어떤 존재가 강하게 나를 끌어당기는 듯한 그곳에는 으레 내 어린 시절과 그리운 고향이 숨어있었다.

아주 오래전이었지만 잊혀졌던 장면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걸 보면 어린 시절 고향과 함께했던 기억이란 얼마나 강렬하고 뿌리가 깊은 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동해안의 작은 어촌마을이다.
집에서 십리나 떨어진 읍내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자그마치 9년 동안이나 걸어다녀야 했던 인고의 시간과 추억들이 내 속에 담겨져 있었던 ....

학교에 닿으려면 개미 허리처럼 가늘고 꼬부라진 산길을 수차례 오르내리며 가쁜 숨을 쉬어야 했고 신작로 초입에는 당장이라도 허물어질 듯 누운 작은 구멍가게가 쉼표처럼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간이 버스들이 신작로에 등장할 때마다 우리를 자유롭게 했던 넓은 길을 내주고 긴 백양나무가 서있는 길 모서리에서 차가 지나가길 기다렸지만 정작 차들은 우리들을 조롱하듯 일으키는 뽀얀 흙먼지를 고스란히 뒤집어써야했다.

그럴 때면 우리는 신작로를 걷는 일이 따분하고 시들해져서 날개가 가벼운 새들처럼 샛길로 빠져나와 바닷가로 이어진 길을 찾아가기도 했다.

바다가 보이는 산길은 꼬불꼬불하고 언덕이 많아 걷기에 힘이 들긴 했지만 조금만 참고 견디면 작은 산들은 감춰진 속내를 드러내듯 거침없는 푸른 바다를 펼쳐내곤 했다.

그런 시원한 풍경이 내 속에 눌려있던 답답하고 무료했던 생각을 말끔히 지워내곤 했다.

가끔씩 내 앞으로 펼쳐지는 그런 풍경에 이끌려 어떤 때는 나 혼자서 그 길을 가기도 했다.

산길과 바닷가의 길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는 큰 소나무 한그루가 있었고 그 주위로 사람들이 지날 때마다 기도하듯 쌓아놓은 돌탑들이 세월의 정적을 지키듯 둘러있었다.

자세한 뜻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이곳을 국시대라 불렀다.
국시대에 이르면 좌측으로는 바다와 인접한 이웃마을이 반쯤 얼굴을 내밀었고 우측으로는 금봉산이라는 거인처럼 우람한 산 하나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길을 달려오다가도 우리는 종종 그곳에 나란히 누워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거칠었던 호흡을 가다듬곤 했다.

겨울이면 가끔씩 금봉산 정상에 눈이 내리고 중턱에 흰 구름이 한가로이 걸리곤 했는데 그 모습을 보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다.

어른들은 우리에게 공부를 열심히 해야 부자가 되고 훌륭한 사람이 된다며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공부가 배고픔을 해결해줄 것 같지 않았다.

기껏 학교를 졸업한 마을의 형들이나 어른들이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산과 바다에 갇힌 채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나의 앞날은 불을 보듯 뻔했고 장차 어른이 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두렵고 암담했다.

그래서 어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공부란 싫지만 적당히 참아내야 하는 일에 불과했고 좀처럼 가난과 고난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있는 분명한 무언가가 보이지 않는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우리는 산길을 오가며 품어왔던 그동안의 울분을 터뜨리듯 결의에 찬 반란을 시작했다.

유난히 읍내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워보였는데 ‘산에 가자!’
누군가의 솔깃한 제안에 난데없이 목적지가 학교 대신 금봉산으로 정해졌다.

우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각자 허리춤에 묶고 다녔던 책들은 큰 소나무 아래 낙엽과 바위 아래에 숨겨놓았고 몸에는 가벼운 도시락 하나만 지녔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낮선 길을 걷는 동안 간간이 선생님과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 한곳이 불편했지만 함께하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매번 억지로 참아왔던 공부 대신 우리들이 한 번쯤은 하고 싶은 일을 해보는 것도 그리 큰 죄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평소 학교에 충실했던 것은 아니지만 야생 기질이 넘치는 우리에겐 좁은 교실보다는 산을 누비는 일이 훨씬 인간적이고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비록 걷기에는 자신 있는 우리들이었지만 금봉산은 실제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멀었고 거대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산은 갈수록 험준하고 우리가 다가 갈수록 우리를 거부하는 듯 멀리 비켜있었다.

지나온 길을 되짚어보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까마득하고 두려웠지만 그 누구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랜 시간 길을 걷다보니 점차 활기를 잃었고 입가에서의 종알거림도 차츰 사라졌다.
산 입구에 이르자 모두가 피곤함에 찌들은 패잔병처럼 기진맥진 했다.
그나마 지친 서로를 위로하며 다다른 곳이 산 중턱을 조금 못 미친 지점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견고한 둑이 무너지듯 쓰러지며 한참을 꼼짝없이 누워있었다.
산 너머에 있을 무엇인가를 보고 싶었지만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시간도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먼 길을 떠나온 우리에게 깊은 산은 색다른 풍경을 주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않고 자란 아름드리 나무들은 하늘을 떠받치듯 튼튼했고 산 속은 무섭도록 고요하고 어두웠다.

소나무 가지사이를 통과하는 여러 갈래의 강한 빛줄기에는 신비롭게도 푸른빛이 감돌았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티끌 없는 맑음 때문인 듯했다.

숲 속에 내려앉은 무거운 침묵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듯했으며 알 수 없는 평온함이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산의 품이란 넓고도 따뜻해서 우리들이 지나온 힘들고 서러운 시간들에 대해 위로를 받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우리가 학교를 빼먹은 사실은 우리가 늦은 밤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탄로가 났다.

동구 밖에서 애써 화를 삭히며 밤늦도록 우리를 기다리던 부모님들의 근심어린 표정과 한숨소리가 겁에 질린 내 마음을 때렸고 “장차 무엇이 되려고 저 모양인 지......”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어머니의 한탄과 연신 내 종아리를 때리며 눈물 섞인 물푸레 회초리 소리가 쟁쟁하다.

부모님에게는 부끄러웠지만 내 인생을 돌아보면 그 때의 경험이 나를 많이 키워준 듯하다.

그 때 어린 눈으로 세상의 크기를 가늠 할 수 있는 정확한 잣대가 있었다면 우리는 결코 산을 오를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가 꿈을 꾼다는 것, 꿈을 찾아나서는 것은 아무 것도 계산되지 않은 순수함이 우선되어야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비록 정상을 오르지 못했지만 금봉산은 나이 들어서 까지도 줄곧 내 마음 속에 자리하였고 내가 살면서 흔들릴 때마다 지탱할 힘을 주기도 했다.

나이 들어서도 계속 꿈을 꾸는 것도 내가 산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그 시절 금봉산이 내게 주었던 신비로움과 따뜻함 때문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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