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광양서초등학교 1회 졸업기념사진
한국전쟁 포격으로 전소돼 지금은 볼 수 없는 교사(校舍)

오늘의 사진은 1946년에 열린 광양서초등학교 1회 졸업기념 사진입니다. 하얀색 저고리와 검은색 치마를 차려입은 여학생들과 까까머리 남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시간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은어떼처럼 훌쩍 회귀하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생 뒤로 서 있는 2층짜리 목조건물도 그 웅장함에 감탄이 절로 날 지경입니다.

오늘은 그냥 광양교육의 요람이자 산실이었던 광양서초등학교의 역사를 세심하게 살펴보고 말을 아낄 일입니다. 이냥저냥 이야기를 덧붙이기에는 이 사진 한 장이 간직한 시대와 그 시대를 휩쓸었던 역사의 광풍과 신산스러움이 너무도 크기 때문입니다.

광양서초등학교는 일본이 조선을 제 아가리에 집어삼키기 직전인 1907년 9월 옛 군민회관과 제일약국을 잇는 골목에 자리 잡고 있었던 옛 향청이 있던 자리에 사립 희양학교라는 이름으로 설립됐습니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던 대한제국이 광양군에 마지막으로 봉한 군수였던 서상붕 군수가 설립을 주도했지요. 당시 학교는 1개 교실에 42명의 전교생이 수학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10년 6월 박희권의 주도로 사립 광명학교로 개명해 명륜당을 빌려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1년 뒤인 2011년 11월 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광양공립보통학교를 개교하게 됩니다. 때가 흘러서 당시 학교설립 인가처는 서글프게도 왜놈들에 의해서였지요.

더나가 왜놈들은 1914년 광양공립보통학교 인근에 광양공립심상고등소학교 설립합니다.

조선인 학생들과 분리해 바로 왜인들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를 설립해 운영했던 게지요. 물론 왜인들의 자녀가 수학하던 광양공립심상고등소학교는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왜놈들에게 학교를 인수해 일색을 제거한 뒤 광양동초등학교라는 이름을 얻게 되지만 왜정시대에는 조선인 차별의 상징 같은 곳이라 아니 할 수 없었지요.

아무튼 광양서초등학교는 다시 1938년 4월 1일 광양서공립심상소학교로 개명돼 운영되다가 1941년 4월 1일 광양서공립국민학교라는 이름을 거쳐 해방 1년을 넘긴 1946년 11월 광양서초등학교라는 이름을 얻어 1996년 전국 모든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개명되기 전까지 50년 동안 수많은 학생들에게 배움의 터전이 돼 주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7년 광양지역 학교 가운데 최초로 100년이라는 찬란한 역사를 받아 안게 되지요. 대한제국과 왜정시대, 그리고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쳐 100년이라는 한 세기를 배움의 터전으로 뿌리를 내려온 것이니 어찌 어여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이제 살짝 광양서초등학교의 속살을 잠깐 들여다보겠습니다. 1945년 8월 17일 광양군민들이 조국의 해방을 축하하는 범군민대회를 연 곳도 바로 광양서초등학교 운동장이었습니다. 당시 운동장 일부는 콩밭이었다고 전해옵니다. 궁핍했으니까요. 곡식을 키울 땅이 필요했으니 가히 책망할 일은 아닙니다.

당시 시국수습군민회의 김완근 위원장은 서초등학교에서 해방경축군민대회연설을 하기도 했습니다. 6.25때는 유엔기의 폭격으로 학교 건물이 전소되기도 했습니다. 1회 졸업기념사진에 남아있는 저 웅장하고 아름다운 목조건물은 그렇게 사라졌습니다. 이 와중에 인민군 점령 시에는 군민들을 대상으로 인민군의 웅변이 펼쳐지기도 했고 한국군이 회복했을 때에는 그 반대의 일들이 벌어진 슬픔이 반복된 곳도 바로 이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교사가 없어지자 학생들은 군용천막을 임시 교사로 활용해 공부를 계속했지요. 밀가루죽을 급식으로 받아먹으면서도 학교는 계속 열렸고 이는 전쟁 중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처럼 그 옛날 배움의 길은 오늘 날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하거나 말랑말랑한 것이 아니었지요. 배울 수 있다는 게 참 소중한 나날이었습니다. 잠시나마 그런 옛 일들이 궁금하시거든 광양서초등학교 개교 100주년 기념관을 한 번 다녀가시지요. 짧지만 옛 역사 속을 걷는 기분이 참 좋지 않을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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