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을 위한 광양역사 교과서

조선 시대에 일어났던 전쟁 중 하나를 꼽아 보라고 하면, 대부분 임진왜란을 꼽을 거야. 이순신 장군이 활약하고, 국내외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던 전쟁이기도 하지. 지금부터 우리가 알아볼 비석은 임진왜란 동안 세력을 키워 청으로 국호를 바꾼 후금이 1636년에 쳐들어왔던 병자호란과 관련이 있어. 바로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이끌고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승대장 회은장로의 비로, 옥룡면 동곡리 송천사의 옛터에 남아 있어.

회은장로비는 승대장 회은 응준 (悔隱應俊, 1587~1672)의 활약상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야. 받침대인 좌대와 비석의 몸체인 비신, 머릿돌 이수로 이루어져 있고, 이수 앞면에는 쌍룡이 여
의주를 가운데 두고 희롱하는 모습이, 뒷면에는 용, 게, 개구리, 자라 등이 새겨져 있어.

이 비의 정확한 명칭은 ‘유명조선국전라도광양백운산송천사지정헌대부팔도도총섭겸승대장회은장로비명’이야. 혹시 몇 글자인지 세봤니? 무려 36자야! 엄청나게 긴데,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일단 이름의 첫 부분에서 비의 소재지가 ‘유명 조선국 전라도 광양 백운산 송천사지’임을 알 수 있어. ‘유명 조선국’이 무슨 뜻일까? 이런 말은 17세기 이후 조선시대에 제작된 비명의 앞부분에 으레 붙곤 했대. “명나라에 있는 조선”, “명나라가 있으므로 조선이 있다”, “중국의 문명을 조선이 이었다.” 등으로 풀이할 수 있어. 조선 사대부들은 청을 오랑캐의 나라로 여겼고, 패배하여 삼전도의 치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으로는 절대 굴복할 수 없었어. 그래서 중화의 나라 명의 신하라는 자존심을 표현했지.

이거나 그거나 둘 다 신하라는 건 마찬가지인데, 왜 덜 부끄럽게 느끼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하지만 명이 멸망한 후 조선이 중화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자부하는 ‘소중화 사상’이라고 생각해보면 조금 이해가 될지도 몰라. 작은 중국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중국을 이어 이제는 조선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자존심을 담았던 거야. 회은장로비에는 이러한 자긍심이 담겼다고 볼 수 있는 거지.

두 번째 부분, ‘정헌대부 팔도도총섭겸 승대장 회은장로’는 회은장로의 관직을 밝히고 있어. 회은장로는 병자호란 때 벽암대사 각성이 승병을 일으켰을 때 그의 참모로 활약했어. 조정에서그의 공을 높이 사 인조 25년 (1647), 조선 최고의 승직 팔도도총섭을 내렸어. 현종 원년 (1660)에는 승대장으로, 현종 4년 (1663)에 정2품의 정헌대부로 임명했지.

특이한 건, 순찰사와 현감이 절과 함께 비를 건립했다는 거야. 조선은 유교국가였고, 승려를 천하게 여겼어. 그랬던 시대에 순찰사와 현감이 승려의 비건립에 앞장섰다는 건 회은장로의 청나라에 대한 저항을 높이 평가했다는 뜻이지. 하지만 장로라는 말 앞에 법명인 응준이 아니라 호 회은을 붙였다는데서 한계가 보여. 어쩔 수 없는 성리학의 나라였던 거지.

비문의 마지막에는 ‘황명숭정 병자후 42년 (皇明崇禎丙子後四十二年)’이라고 건립 연대가 적혀 있어. 언제를 의미하는 걸까? ‘숭정’이란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의 연호야. 소중화 사상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지. ‘숭정 병자후 42년’은 숭정 기원을 사용하기 시작한 1628년 이후 첫 번째 맞이하는 병자년(1636년, 회은장로가 승병을 일으킨 해)을 기준으로 42년째라는 뜻이야. 즉 숙종 3년 (1677년)이 되겠어. 지금까지 회은장로비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어때? 조선 사대부의 소중화사상이 가득 담긴 비인 것 같지?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명을 떠받들었다는 점에서 온전히 주체적이라고 하기 힘들지만, 아무튼 그 당시 사대부들에게 존재 이유나 다름없었다는 건 확실해.

■ 송천사터와 선각국사비
회은장로비가 있는 송천사는 옥룡사, 운암사와 더불어 백운산의 3대 사찰로 손꼽히던 곳이었지만 예전에 폐사되어 지금은 흔적을 찾기도 힘들어졌어. 승탑 3기와 회은장로비만이 여전히 꿋꿋히 절터를 지키고 있지.

송천사에는 선각국사 도선의 비가있었대. 조선 영조 대에 영의정을 지낸 도곡 이의현의 [도곡집 (陶谷集)]에 [백운산송천사선각국사비명]이 남아 전하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훼손된 도선의 비를 다시 세웠다고 해. 한편, 매천 황현(1855~1910)의 [매천집]의 [송천연명 (松川硯銘)]이라는 글이 있어.

광양의 송천사에 오래된 비석이 있었다. 그 비석 글씨가 고우면서 힘차서 명품이라 할 만했는데, 절이 폐사되면서 비석도 훼손되었다. 내가 그중에 한 조각을 구해서 잘 다듬어 벼루로 만들고는 다음과 같이 명을 지었다.

이 돌이 과거에는 글을 싣더니
지금 와선 먹물을 담고 있구나
그나저나 문자와 인연이 있는
아아, 아름다운 이네 돌이여
부처 떠나 유학으로 돌아왔으니
오랜 세월 영원토록 끝내 길하리

이 글을 통해 황현이 활동하던 시기에 송천사는 이미 폐사되었고 도선비도 훼손되었음을 알 수 있어. 그런데 1750년에 제작된 [해동지도]와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라도지도]의 광양현 지도에 옥룡사와 함께 송천사가 표기되어 있어. 결과적으로 송천사는 19세기 중반 즈음에 폐사된 것으로 보여.

역사의 흐름이란 모든 것을 쇠하고 사라지게 만드는 걸까? 절터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다니 아쉬울 뿐이야.

▲ <광양제철고 미술동아리 'NOON'>

무등암의 타임캡슐-복장물
불암산의 북동쪽 가파른 경사면에 무등암이라는 암자가 있어. 이 무등암에는 제작된 시기와 명칭이 불분명한 높이 62cm의 작은 보살좌상이 있었어.
제작 시기에 대해 많은 의문이 있었는데, 1999년 12월 무등암 보살좌상의 ‘복장물 (腹藏物)’이 순천대 최인선 교수에 의해 확인되면서 모든 의혹이 풀리게 됐지.

복장물이란 불상 (佛像)을 봉인할 때 불상의 몸 안에 넣어둔 신앙적 의미를 갖는 물건들을 일컫는 말이야.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복장물들은 불상에 대해 거의 모든 것들을 알게 해주는 일종의 ‘타임캡슐’이라고 할 수 있어.

지난 2005년, 경남 합천 해인사 법보전 비로자나불좌상의 복장물이 발견되면서 이 불상이 국내 목조불상 가운데 가장 오래된 ‘중화 3년 (신라 헌강왕9년, 883)’의 작품인 것으로 판명됐어.
그동안 조선시대 불상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는데, 타임캡슐 복장물 덕분에 진짜 정체가 밝혀진 거야.

무등암 보살좌상은 해인사 비로자나불좌상과는 반대의 상황이야. 사찰은 신라 때 조성된 것으로 주장하고 있었어. 그렇지만 대좌 밑의 지름 13cm 원형 복장공 안에서 발원문, 진신사리보치진언문, 후령통 (복장을 넣는 통) 등이 발견되면서 보살좌상의 정확한 명칭과 조성 시기, 최초의 봉안처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어.

보살상의 명칭은 대세지보살, 조성연대는 강희 17년 (조선 숙종 4년, 1678), 봉안처는 지리산 소은난야 (小隱蘭若)였음이 밝혀졌지.
무등암 보살상은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 즉 사각형의 얼굴, 일자형의 눈, 반원통형의 코 등 인체의 사실적 표현이 부족한 점을 잘 반영하고 있어.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강탈할 시기에, 일본인들이 석굴암 본존불 속 복장유물을 노리고 둔부를 때려 파괴했다고 전해지고 있어. 요즘도 많은 문화재 절도범들이 복장물들을 털어가고
있어. 다행히도 무등암 대세지보살좌상의 복장물은 안전하게 전해져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알려주었지만. 사라지면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우리의 소중한 역사적 문화재들을 지키기 위해모두 노력해야 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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