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의 아침입니다. 벌써 조금은 멀리 있어 그리운, 때 이른 가을편지를 써야 될 때가 아닌가 싶은 그런 날입니다.

한 여름 세계를 불구덩이처럼 달구었던 더위를 잠시 물리칠 것만 같던 태풍은 소란스럽고 제법 유난스러웠던 것과는 달리 ‘괜한 호들갑에 체면이 참으로 말이 아니게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아니 들 수 없을 만큼 무안스럽게도 맥없이 소멸됐지요. 늙어 볼품없어진 다소 힘 빠진 건달처럼 말입니다.

그래도 그 소문 사납던 태풍이 물러나면서 아무래도 비구름을 잠시 불러들인 모양이니 내내 목이 말랐던 이 땅의 입장에서야 어디 흠 잡을 일이겠는지요.

일요일 아침, 책상머리에 놓여 있는 옛 사진 한 장은 참으로 평화롭고 고즈넉한 목가적 풍경이 담겨 있습니다. 오래 전 시인 정지용이 읊었던 그대로 말이지요. ‘넓은 벌 동쪽으로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을 담백란 수묵으로 풀어 펼쳐놓은 듯 참 고운 사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진 속에는 지게를 어깨에 짊어진, 검게 그을린 젊은 아비가 바람이 송송 드는 모시옷을 입고 앞장서 걸으면 갓 난 어린 동생을 들쳐 업은 어린 누이가 아버지의 그림자를 피해 뒤따라 걷고 있지요.

제법 오랜 이야기를 품고 있을 것 같은 당산나무와 그곳에 고삐를 메인 채 풀을 뜯고 있는 황소마저 한가롭지 않을 수 없다는 모습으로 느린 시간을 견디고 있는 모양입니다. 느리고 평화로운 시간들이 사진 속에 담백하게 그려져 있으니 이를 들여다보는 사람조차 조금은 천천히 낮은 숨을 고르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속살을 살짝 열고 들어가면 사진은 결코 그리 만만한 때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차라리 아주 오래된 슬픔의 저장창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1945년 8월 해방의 기쁨은 아주 잠시 한반도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비극은 빠르게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점령으로 이미 예견돼 있었지요. 힘없는 해방을 맞은 조선은 이후 심각한 좌우대립의 광풍이 불어 닥치게 됩니다.

그 중에도 1948년 4월 3일 제주항쟁은 한국현대사의 가장 아픈 부분입니다. 항쟁의 발발이유는 여러 가지 변수가 존재했지만 결국 이 엄청난 학살사건의 장본인은 이른 바 ‘초토화 작전’이라고 불리는 학살명령을 내린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명령으로 희생자만 3만에서 4만 명에 달할 정도였으니까요.

무엇보다 제주항쟁은 우리지역 등 전남 동부전역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영향을 미친 여순항쟁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지요. (물론 이 사건 역시 여러 변수가 존재하지만)제주항쟁을 진압하기 위해 파병을 기다리고 있던 제주 14연대 주둔군이 민족학살에 참여할 수 없다며 1948년 10월 19일 파병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킨 게 바로 여순항쟁의 시작입니다. 이렇게 발생한 여순사건은 광양지역에도 필연코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지요.

무엇보다 광양지역에서 여순항쟁 관련 첫 민간인 학살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첫 민간인 학살사건은 항쟁 하루 뒤인 10월 20일 광양읍 덕례리 주령골에서 발생했습니다. 14연대와 대치 중이던 광양경찰서 경찰들은 이날 30여 명의 주민을 연행해 광양읍 덕례리 주령골에서 집단 학살한 것이지요. 그야말로 학살이라는 말 이외에는 달리 이름 할 수 없는 아프고 슬픈 사건이었습니다.

이후 해방 격변기를 거치는 동안 광양은 백운산 자락을 중심으로 이 같은 민간인 학살이 곳곳에서 발생했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1949년 6월 25일 다압지서에 갇혀 있던 금천리 최순용 등 10여 명의 주민들이 다압지서 뒤 도로가에서 희생되었고 1949년 8월 3일에는 진도 임회면 박월암이 경찰의 체포를 피해 도망 다니다 체포돼 용호리 골짜기에서 총살을 당해야 했지요.

1949년 9월 16일에는 광양읍 주민 32명이 광양읍 덕례리 반송재에서, 19명이 광양읍 세풍리 뒷산에서, 40여 명이 광양읍 우산리 ‘쇠머리’에서 학살당했습니다. 이외에도 같은 시기에 광양경찰서로 연행되었던 진상면 어치리 서순모 내리 40여 명, 옥룡면 죽천리 박노준 등 10여 명, 옥곡면 묵백리 30여 명, 옥룡면 추산리 12명 등 100여 명이 넘는 주민들이 구랑실재 등에서 집단 학살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경모가 남긴 이 사진에는 바로 이 같은 억울한 죽음의 냄새가 간직돼 있습니다. 피비린내 나는 두려움이 숨겨져 있습니다. 어르신들이 전하는 말로 당시 광양은 “낮에는 군경이, 밤에는 반란군이” 점령하던 시절이었지요.

사진 속 당산나무 뒤로 펼쳐진 대나무 울타리는 당시는 ‘산사람’으로 불리던 빨치산의 공격을 막기 위해 토벌대가 쳐놓은 방어선이었습니다. 울타리를 경계로 서로에 대한 적의와 분노를 품고 총구를 마주하고 있던 자들이 느꼈을 고요와 적요 그리고 공포가 이 사진 한 장의 또 다른 이름일 것입니다. 여순항쟁 70주년을 앞두고 마음이 참 무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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