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 16년을 살면서 바다는 처음본 것은 아닙니다. 고개 하나 훌쩍 넘으면 망망대해가 아니어서 좀 서운하긴 해도 남해바다의 하얀 포말이 선창에와 부딪히는 망덕포구와 배알도가 있으니 말이지요.

제 먼 길이긴 해도 망아지처럼이 들녘 저 산자락을 뛰어다니던 시절이니 작정하고 나서면 오래지 않아 전어냄새 속에 감춰진 갯비린내 진동하는 바다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망덕포구를 벗어나 남해를 가로질러 부산으로 가는 길은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었지요. 사내라면 젊어 한 번쯤 바다의 사나이, 마도로스를 꿈꾸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막상 눈앞에 펼쳐진 망망대해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난생 처음 육지가 보이지 않는 너른 바다에 목범선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주는 공포는 말로 이루 다할 수 없는 지경의 일입니다.

무엇보다 목전을 넘어 덮쳐오는 가공할 위력의 파도에 절로 주눅이 들어 손에 잡히는 무엇이나 생명줄인 듯 꼭 붙들어 안고 있을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지요.

간혹 눈앞에 바다와 대륙이 만나 토해 놓은 절경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아직 고추도 여물지 않은 까까머리 중학생에겐 바다와 파도 앞에 절로 경외를 표할 밖이었지요.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어머니 손에 이끌려 투덜대며 절을 올렸던 부처님과 다녀 본 적도 없는 교회의 하나님께 기도는 왜 아니 했겠습니까. 제발 어서 땅을 밟을 수 있게 해달라고 속으로 빌고 빌었 지요.

1951년 목선 타고 부산 도착한 진상중 1기생들 밟고 있을 때는 당연한 줄 알았던 땅의 존재를 바다 위에서 출렁거리며 수 시간을 달려가는 동안 깨달았습니다.

땅을 밟고 살 수 있다는 일의 소중함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화인처럼 받아들이던 순간입니다.

마침내 부산항에 도착했습니다. 누구할 것 없이 공포와 함께 배멀미에 녹초가다 되었을 때야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배멀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됐지요. 육지에 발을 디딘 순간 땅이 울렁거렸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사내이니 사진을 찍을 때는 세상 누구보다 늠름한 척 폼을 잡았습니다.
친구들도 다들 그러했지요. 언제 겁에 질렸냐는 듯 말입니다. 지금 다시 보니 담임선생님도 갖은 폼을 다 잡았었군요.

오늘의 사진은 진상중학교 1회 졸업생 들입니다. 목선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해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단디 4284년이니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1951년의 여름 어느 날이겠지요.

7월이라 했으나 필시 음력의 일이니 더위가 오래도록 기승을 부리던 8월 어느 때쯤일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 이때는 전쟁조차 아직 끝나지 않았던 시절입니다. 오히려 1951년 그래 1월에는 연합군과 한국 해병대의 인천상륙작전 성공한 이후 무서운 기세로 불녘 땅을 질주하다 중국인민군의 참전으로 1.4후퇴를 결정해야 했고, 또 다시 서울을 중국인민군에게 내주면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시절입니다.

국군과 UN군의 3월 18일이 지나서야 서울은 재탈환하는 등 격전이 계속되고 있었지요.
정전선언이 1953년의 7월의 일이니 한반도는 포화의 굉음소리가 끝이지 않았던 때입니다.

더구나 백운산을 무대로 활동하던 빨치산의 반격으로 광양은 전쟁 이후에도 토벌이 진행됐으니 그 전쟁통 속에서도 학생들은 학생들의 일을 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백운산 등지에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처 퇴각하지 못한 북한군들이 입산해 계속 저항을 하고 있었습니다.

태백산과 지리산 등 지역은 빨치산의 거점이 되었지만 태백산 지구 전투경찰사령부와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가 군부대가 합동으로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돌입하자 1951년 11월 전남도당 유격대사령부가 화순 백아산에서 백운산으로 이동을 결정하면서 백운산은 일대 빨치산의 거점이 되었지요.

백운산은 광양·구례·곡성·순천 등과 연락이 쉽고 보급이 용이하다는 게릴라 전상의 이점 등으로 빨치산의 거점으로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평가돼 왔습니다.

무엇보다 군경에 포위된다고 하더 라도 지리산으로 탈주하기에 유리했지요. 당시 백운산는 전남유격대 제14연대, 88정치공작대, 광양군당 유격대 등이 활동하면서 하루도 평화로울 수 없었는데 요, 군경은 빨치산과의 연계를 끊기 위해 광양의 산간벽촌들을 무자비하게 불 질러버리던 때였으니 백운산 자락에 접한 진상면도 예외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진을 보니 전쟁 속에도 배움은 계속 됐고 젊은 추억들도 쌓여갔던 모양입니다.
저들의 웃음도 가볍게 느껴지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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